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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느 Mar 06. 2021

해 뜨는 집에서 누리는 기쁨

좋은 집은 어떤 집일까?


일출을 사랑했던 나

오래전 일이다. 근사한 일출을 보겠다고 절친과 경주 토함산으로 새벽에 대구에서 출발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일출은커녕 밀리는 차안에서 운전하는 사람만 고생시키고 우리는 가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새 해 아침을 일출을 보겠다고 떠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 줄이야~~ 그때의 로망을 잊지 못해 그 후에도 일출을 보러 직장 동료들과 동해 펜션으로 떠나기도 했고 일출 하나 빼놓고는 실망스럽던 숙소에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기도 했다. 바다 조망과 일출 조망이 있는 곳은 어디나 사람들이 선호하는 곳이라서 때를 놓치면 예약하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일출은 항상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한 번은 드라마 '겨울연가'몰아서 보고 나서 깜깜한 밤중에 정동진으로 일출을 보러 출발한 적이 있다. 그 날 눈이 엄청나게 왔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 그때 집에 와 계신 어머님께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쪽지 한 장을 남겨두고 남편과 설레는 마음으로 떠났다가 하마터면 오도 가도 못할 뻔했다. 고속도로를 나와 강원도 쪽으로 빠져나오니 이미 예사롭지 않은 빙판이었던 것이다. 언덕배기에 있는 고등학교에 근무할 때 눈이 많이 오면 교문 앞으로 가는 길은 모험 그 자체였다. 몇 번 미끄러져서 핸들이 마음대로 돌아가는 경험이 있던 터라 빙판 언덕길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던 나는 남편이 미끄러질까 덜컥 겁이 났다. 결국 정동진행은 눈 속에 갇혀  눈만 실컷 보고 왔다. 해뜨기 전까지 넉넉하게 출발했지만 빙판 도로는 알다시피 기어가는 속도라 시간이 무한정  걸렸다.


돌이켜 보니 내 마음속의 집은 항상 해 뜨고 해 지는 광경을 볼 수 있는 예쁜 정원이 있는 목조 가옥 아니면 벽돌집이었던 모양이다. 아마 미국 드라마의 영향 탓인지 내가 본 수많은 명작소설의 힘인지도 모르지만 집의 조망은 그만큼 집을 선택하는 데 큰 메리트이다. 국내에서 도시 근교에 마당 있는 집을 사기란 흙수저에겐 꿈같은 일이어서 마음속의 로망일 뿐 현실에선 바랄 수 없는 일인 줄 알았다. 미혼시절부터 줄곧 옮겨 다니던 단독주택 더부살이와 전세아파트가 다 거실에서 탁 트인 조망을 보기는 어려웠다. 요즘은 더 어려워졌지만 일정 거리를 두고 아파트 동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까닭에 하늘이 보이고 햇빛 들어오는 조망권이나 확보하면 고작일 뿐 늘 전방은 또 다른 회색 건물을 보면서 살아야 한다.


전망에 반해 집을 사다

그러다가 우연히 전망이 탁 트인 현재의 우리 집인 이 아파트가 우연히 급매물로 나왔고 평수에 비해 주변보다 다소 저렴한 이 아파트 가격에 매력을 느끼고 남편과 한 번 가 보자고 했던 것인데 집주인이 장담하던 이 집의 전망을 보고 한눈에 반하게 되었다. 그 당시 30평대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던 우리가 분양받은 아파트는 어린이공원과 제법 큰 마트가 인접해 있어서 어린 아이를 둘 데리고 있는 우리가 살기에 쾌적해서 큰 불만은 없었다. 한 가지 불만이라면 그 당시 함께 살던 시어머니와 막내가 한 방을 쓰고 있어서 자기 방을 가지고 싶어 하던 아들의 로망을 채워주어야 하나 하는 아쉬움 정도였다.


당시 고평수 아파트 가격이 주춤하는 시세여서 나름 새로 조명과 벽지를 교체하고 2년 전에 그 집에 왔다는 전주인은 2년 전과 비슷한 가격에 내놓아야 한다는 걸 몹시 아쉬워했지만  이 집의 전망에 홀딱 반한 나는 '전망좋은 집을 가질 호기'라고 생각하고 우리 집을 팔 구체적 전망도 없이 덜컥 남편을 쑤셔서 이 전망 좋은 집을 계약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꽉 막힌 성냥갑 같은 아파트에서 남의 집 회색 벽이나 아파트 상가를 내려다보면서 살았기에 일출과 일몰을 마당에서 볼 수 있는 집을 살 형편이 안 된다면 최소한 일출 거실 조망이라도 나오는 아파트에 살고 싶다는 망이 순간적으로 활활 불타 올랐나 보다. 도시에서 하늘이 보인다는 건 참 매력적인 일이다.


게다가  매일 지쳐서 귀가하면서 운동이라면 정말 싫어하는 우리 부부에게 필요한 생태가 잘 보전된 호수공원이 불과 도보로 5분 이내에 있었다. 그 공원은 여름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주말에 자전거나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게 하고 벌렁 잔디에 드러눕기도 하면서 힐링하던 곳이기도 했다.  농업연구소가 전방에 펼쳐져 있어 절대농지로 개발제한구역이라고 알고 있는 지역이 남향으로 지어진 그 아파트의 조망권 바로 앞에 있었다. 게다가 전철역에서 5분 거리이기도 했고 큰 아이가 다니는 중학교가 바로 코앞이었다. 왼쪽으로는 유럽식 고풍스런 교회가 오른쪽으로는 여기산 자락의 높다란 언덕에 백로 서식지가 있어서 그들이 모여서 날아다니는 장관을 식탁 의자에서 감상한다는 게 굉장히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제 분양대금을 다 갚고 빚 없는 자유를 누릴 판이었는데 다시 크게 한 장이상 대출을 받아야 하나 망설이다가 나의 바람몰이에 남편이 응하는 바람에 34평인 원래 아파트를 싸게 내놓고 전망 좋은 아파트로 이사하게 된다. 그 후 예전 아파트는 쑥쑥 가격이 상승해서 나를 한동안 자책하게 만들었다. 이사한 아파트는 정남향인 집이라서 낮에는 햇빛이 부엌까지 들어오는 집이어서 겨울에도 낮에는 난방을 꺼 놓을 수 있는 집이었다. 천정이 높고 방이 여러 개 이기 때문에 역시 난방비는 전보다 많이 나왔지만 복도처럼 긴 방과 방 사이의 간격이 확보되어 있어서 자기 생활권이 더 필요한 두 아이의 방을 확장해 주고 이 집에 들어온 후에는  모두 답답한 줄 모르고 살았다. 명절에는 어른 8명, 친척이 키우는 개 2마리, 뛰어다니는 어린 두 조카와 우리 아이들까지 며칠씩 한 집안에 머물러 있어도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제 그 집에 완전히 적응했을 무렵 남편의 회사가 지방으로 이전하는 바람에 그 집을 전세 놓고 떠나야 했는데 그동안 살았던 여느 집들보다 더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했다. 오랫동안 고민을 거듭하다가 가족들이 그나마 다같이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은 방향으로 결정하고 남편을 따라 직장도 옮겨갔다. 그 이후 고평수 아파트가 매매가 부진하여 그 집은 전세를 놓고 물가가 비싼 남쪽 도시에서 더 좁은 아파트에서 전세로 살게 되었다. 전세살이가 그러듯이 주인의 사정으로 이사를 하기도 하고,  내 직장 가까운 곳으로 옮기기도 하면서 5년 동안 3번 이사를 다니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작은 집으로 이사 다니게 되니 큰 소파나 장롱과 침대를 처분하고 진짜 단출한 살림살이로 살게 되었는데  그 무엇보다  아쉬운 건 그 거실 조망과 여유롭게 누리던 공간의 편안함이었다. 한 번은 공원 조망권에서 잠시 좋았던 때도 있었지만 여전히 좁은 집에서 짐을 제대로 풀지 못하고 살았더니 마음 한 구석은 늘 불편했던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살았던 전셋집은 주인이 세를 놓으면서 전에 있던 거실 블라인드를 다 떼서 가져가고, 눈 앞 지척에 남의 집이 바로 보였다. 거실 소파에서 뒹굴거리며 하루 푹 쉬고 싶어도 그 눈부신 태양과 정면에서 보이는 회색 건물은 참 고역이었다. 남의 집에서 비싼 블라인드를 만들어 살자니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들고 그러면서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처럼 간절하게 그 집의 전망이 그리웠다. 그러다가 막내가 대학에 입학하여 방을 얻어 독립하고 내가 목표했던 경제적 자유를 얻게 되자, 하루 종일 남의 집 회색 벽을 보면서 블라인드 없는 거실에서 눈을 찡그려 가면서 더는 귀중한 남은 인생소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집에서는 공원도 도보권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고생하고 나서 얻은 자유의 시간을 낯선 곳에서 회색 벽을 보면서 뭘 한들 즐거우랴!


나는 걸어서 내가 얼굴 아는 가게에서 수다도 떨고 가끔 전화하면 쪼르르 나와서 함께 커피도 마시고 맥주 한 잔을 하던 소탈한 이웃도 그리웠다. 두 아이의 어린 시절 추억이 구석구석 묻어있는 아이들의 고향이고 같이 아이 키우면서 정들었던 고만한 나이 또래의 직장 동료들이 아직도 그 부근에 살고 있던 우리 집이 내게도 고향 같은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딘가에 땅을 사서 전원주택을 지어볼까 하는 로망을 남편은 실현시키고 싶어 했지만 막상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머물 나 자신과 아직도 도시에서 교육과 일터를 잡아야 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 선택은 무리가 있었다.  우린 둘 다 도시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이고 딱히 시골에 연고지도 없을뿐더러 남편이 차를 몰고 친구들이나 만나러 가면 나는 그 깜깜한 외지에서 집콕해야 한다는 건 전혀 로맨틱한 상상은 아니었다. 바퀴벌레와 파리만 봐도 소스라치는 아이들은 어쩌며 나 역시 벌레라면 질색이었다. 아직도 배우고 싶고 가고 싶은 곳은 도시에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아버지가 땅을 샀을 때 엄마가 시골 농장살이를 거절했듯이 나도 도시를 떠나서 깊은 시골에서 살아낼 자신도 희망도 없었다.


다시 찾은 전망좋은 우리 집

남편이 여전히 그 지역에서 근무해야 했지만 나는 큰아이와 합친다는 의미를 부각하면서 우리 집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를 설명했고 예전 아파트를 리모델링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20년이 넘은 아파트여서 배란 새시나 벽지며 부엌 싱크대, 붙박이장까지 교체하자니 예상보다 곱은 비용이 나왔지만 남편과 힘겨루기를 하면서 이중 새시와 부엌 싱크대만은 돈을 쓰더라도 마음에 들게 하자는 합의를 간신히 했다. 산지 오래되지 않은 소파는 그대로 쓰기로 했지만 임시로 사용하던 얄팍한 매트리스는 남편의 자취방으로 넘기고 나는 바랬던 브랜드의 퀸사이즈 침대를 사서 5년 만에 제대로 잠을 자 보게 되었다. 

이렇게 리모델링한 그 집에 이주하던 날 큰아이의 산더미 같은 몇 년동안의 자취 살림이 들어왔고, 몇 달 후에는 군대 간 아들의 자취용품 일체가 그리고 올 겨울에는 한 동안 집에서 출퇴근하게 된 남편의 물건을 차례로 정리하고 나서 이제야 우리 가족은 합체가 되었다. 새로운 짐이 들어올 때마다 그동안 독립해 살던 성인이 된 아이들의 물건은 참 세월만큼이나 많아져서 거기에 맞는 장을 새로 들이느라고 한동안 힘을 빼기도 했다. 리 모델한 이후 이제는 그동안 간직했던 책을 정리할 책장을 놓을 곳도 생기고 흔들거리던 싱크대 장은 산뜻한 하얀색 나뭇결 무늬 싱크대로, 오래된 체리 색깔은 새시까지 하얀색 옷을 입고 이중 새시로 더 외풍이 차단된 베란다에서 해 뜨는 풍경을 즐기게 되었다. 그동안 아파트 안 뿐만 아니라 베란다 앞쪽에 늘어선 나무들도 계속 무럭무럭 자라서 여름에는 마치 숲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매미소리가 너무 가깝게 들리고 베란다 창으로 높은 나뭇가지에 가끔 새들이 앉았다가 가는 모습이 정겹다.


그동안 주춤거리던 아파트 가격은 서울권 투자와 인근 대형 아파트 단지 분양 및 대형 쇼핑센터의 호재 덕분인지 그 전보다 많이 상승했다. 팔지 않고 다시 이사 온 게 더 재테크에 도움이 되었던 격이라고 할까? 뜻밖에 얻은 행운이지만 그 무엇보다 이 집은 사는 동안 내게 편안함과 안락함을 주던 곳이어서 '살아서 남는 집'이라고 남편과 나는 동의한다. 전철이 가깝고 수도권이라 아이들은 뚜벅이로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는데 불만이 없고 남편이 퇴직하면 굳이 차를 몰고 다니지 않아도 전철 타고 이 쪽 끝에서 저 쪽 끝으로 매일 소풍 다니듯 다녀도 된다.



나는 내 나름대로 이 집의 일출을 너무 사랑하기에 우리 집에 '해 뜨는 집'이라고 이름 붙여 본다. 마침 중세 교회처럼 우뚝한 교회 탑이 한 쪽에 보여서 더 그럴듯한 전망은 집에 돌아온 이후  매일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 옛 이웃들이 누군가는 시세차익을 보고 계속 집을 팔고 사서 수십억 부자가 되었다고 귀뜸해 준다. 내게도 그나마 안 팔고 돌아와서 잘했다는 이야기도 해 준다. 그런데 그동안 회색 벽만 보고 공원에서 멀리 살았던 나는 오래된 우리 아파트가 너무 좋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리모델링하고 나니 불편함은 없어지고 좋은 점은 더 부각되었다. 꼭 단독주택이 아니라도 아파트도 오래 살면 고향이 된다. 집과 그 주변의 살아온 이야기와 추억이 숨 쉬는 곳. 집 앞 공원을 산책하러 나가면 아이들이 어릴 적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가끔 산책과 함께 즐거운 추억여행을 하고 오면 감성이 채워지는 기분이다. 코로나로 대면을 피하고 있는 지인들을 만나게 되면 이제 완벽한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 것 같다. 나는 사진을 배워 요즘 산책하면서 예전엔 그냥 지나친 작은 것들을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하다.



매일 감동할수 있는 집이 좋은 집이 아닐까?

우리 집 일출을 카메라에 담아 그림과 합성해서 동영상으로 펴 집 해 보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책을 읽고 명상을 할 때 눈 앞에서 매일 펼쳐지는 해 뜨는 광경은 늘 감동이다. 해 뜨는 집의 풍경을 보면서 매일 하루를 살아 갈 힘을 얻는다. 내가 집을 소유한 게 아니라 나와 집이 일체가 된 기분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오래 되면 얼마나 좋은 것을 가졌는지 잘 모르게 된다. 운좋게 좋은 집을 알아보았는데 살다 보니 그 기쁨이 점점 바래져가고 덤덤해졌다. 이 집을 오랫동안 떠나보고 나서야 내가 가진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알아 볼 눈을 가지게 된 것이다. 모델하우스의 화려한 인테리어는 세월 지나면 퇴색하고 제 빛깔을 잃어 버린다.  매일 감동할 수 있는 기쁨이 있다면 그 집은 꼭 사야 할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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