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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느 Mar 22. 2021

사자머리의 그녀들

그 때 그 시절 추억여행 1

학창 시절엔 긴 머리가 로망이었다.

그 로망이 이루어진 건 대학 때였는데, 중학교 시절엔 단발머리. 운 좋게도 고등학교 1학년 때 두발 자유화로 처음 커트 머리를 하게 된다. 앞에는 핑클 파마를 해서 내리고 컬이 있는 커트는 볼륨을 주어 드라이해 주어야 뒷통수가 예뻐지는  스타일이다. 곱슬머리인 나는 아침마다 드라이기로 앞머리를 펴고 뒷머리는 뒤집어지지 않게 컬을 안으로 말아 넣어야 했다. 아침밥을 못 먹을 지언 정 이 앞머리와 뒷머리는 포기가 안 되었다. 단발머리에서 커트를 하게 된 것만으로도 얼마나 신이 났던지~~   

       



그런 우리 세대가 대학에 들어간다는 것은 완전한 두발 자유화를 의미했고 정말 신명 나는 세상이었다. 너도 나도 머리를 길렀고 우리들의 워너비는 미스코리아에 나오는 여자들의 사자머리였다. 웨이브 파마를 한 긴 머리를 드라이기의 뜨거운 바람을 이용하여 앞머리부터 옆머리까지 펴 주는데 스트레이트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컬로 만들어주는 게 핵심이다. 옆머리는 살짝 한 바퀴 뒤로 넘어가서 귀 옆에 얼굴을 띄울 공간을 주면서 뒷머리에 안정감 있게 올라가 딱 붙어 있어야 한다.



이 때 앞머리는 이마가 보일 듯 말 듯 내리고 눈썹 아래까지 내려와서 동그랗게 눈동자 위에서 멈춰야 한다. 뒷머리 역시 컬을 안으로 말아놓고 정수리 쪽은 뜨거운 바람을 넣어서 볼륨을 최대한 살려준다. 마무리는 무스로 촉촉하게 원래 펌의 웨이브를 살려 주고 외출 직전 헤어스프레이로 이 완성된 머리를 고정시켜 주어야 한다. 귀가할 때까지 완벽하게 헤어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기도 했다.     


     

물론 이 머리는 아무나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늘씬한 키에 작은 얼굴이어야 이 풍성하게 볼륨을 준 머리가 신체 비율을 해치지 않는다. 비율이 좋지 않을수록 헤어스타일까지 합친 머리의 크기를 줄여야 스타일이 좋아 보인다. 그러나 뭐 그런 게 대수랴!     



대부분이 여고를 졸업하고 그렇다 할 미팅도 제대로 못 해 본 우리가 남녀공학인 대학을 들어갔으니 외모를 가꾸고 싶은 열망이 하늘을 치솟을 때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남자들은 막연히 긴 머리의 여인을 동경하는 경향이 있는데 뒷모습만 보고 열심히 따라갔다가 고개를 돌리는데 영 아니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우리끼리는 그런 말도 했던 것 같다. "너 머리하고 나서 뒤는 절대 돌아보지 마! 환상 깨게 하지 말고~"    


      

내가 다니던 학교의 후문에는 가끔 이 사자 머리를 한 언니들이 남자 친구를 기다리면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이런 언니들이 의상 역시 힘을 주지 않았을 리 없다. 당연히 빛바랜 미니 청 스커트를 입고 하얀 블라우스는 부풀려서 살짝 앞자락을 스커트 자락 안에 넣어주어 역시 주름이 봉긋 솟아 나도록 해 준 다음 책 몇 권을 끼고 서 있었다. 큰 배낭이나 숄더백은 여성스러운 옷차림의 격을 깨므로 작은 손가방을 책이에 올려서 쥐든가 어깨에서 달랑거리는 귀여운 버튼 백으로 메어주어야 한다.     



그 때 이런 사자머리를 누구보다 잘 소화한 작은 얼굴에 가냘픈 몸매를 한 여고 동창이 같은 과 밥친구가 되었다. 사범대학에 다니던 대다수의 여학생들과는 달리 든든한 재정적 뒷받침에 여러 명의 언니들에게 스킬을 사사한 그녀는 늘 모델처럼 하고 다녔다. 구찌 핸드백에 전공 책 몇 권을 살포시 두 손 모아 가슴에 안고 당시 유행하던 핑크와 하늘색 로 줄이 있는 서지오 바란 테 청 스커트를 입고 빨간색 수제화를 신은 그녀는 당연히 시선을 끌었다.



 스커트를 입지 않은 날은 조다쉬 청바지를 딱 붙게 붙여 입고 하얀 가죽 프로스펙스 운동화를 신었다. 상의는 박스 핏이 유행이었는데 가끔 그녀는 오버핏 청재킷에 하의 실종 스커트나 휘청거릴 정도로 야윈 씬한 긴 다리에 청바지를 입었다. 그녀는 단연 우리 과 아니 우리 단대의 퀸카였다. 주변에 오버핏에 어정쩡한 스커트를 입거나 무릎 나온 청바지를 받쳐 입고 다니던 여학생들도 은근히 많았던 탓에 당연히 돋보이는 존재였다.



남학생들도 지금처럼 옷을 잘 입고 다니던 시절은 아니었다.  남학생들의 패션 테러는  소탈한 성격이거나 신념(?)에 따라 언행일치하는 스타일로 좋게 봐 주기도 했다. 물론 청바지가 잘 어울리게 입을 줄 아는 형들도 있었다.(연인사이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으면 오빠, 아니면 그냥 각별한 손위 남자선배들을 써클에서는 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하얀 학생 운동화에 커트머리를 하고 다닐 때 그녀가 이 정도의 미모인 줄은 전혀 몰랐다. 그저 집안이 부유한 좀 말라깽이 여학생인 줄만 알았을 뿐. 패션과 헤어스타일과 투자의 여력은 사람을 변신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을 만들어 놓는다. 교복 자유화를 처음으로 맞이했던 고 2때부터 이미 재정적 환경이 사람의 외모의 한계를 결정짓는다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한계가 없어진 대학생활에서 '멋'이라는 것은 그렇고 그런 서민층에겐 가끔 부러운 여유였다.



그리고 이 박탈감을  성인이 되어 맛보게 된 것은 그 나마 교복의 장점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나마  입시를 준비하던 2~고3이라는 특별한 기간에 교복자율화를 맞이했으니 잠시 부러움으로 끝났지만 긴 학창 시절을 이런 차이를 느끼고 지내야 했다면 아마 서러운 마음이 들었을 거다.

     


 남들이 웨이브 파마를 하고 사자머리를 하고 다닐 때 정작 나는 스트레이트 파마에 열중했다. 비용 문제로 1년에 1번 할까 말까 였지만 타고난 반곱슬 머리인 나에게 찰랑거리는 머릿결은 동경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문제는 이 비싼 스트레이트 파마가 한 달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비극이었지만 스트레이트 파마를 한 날은 꼭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멋을 내고 학교에 가곤 했다.



머리에 힘 준 날은 아껴 두었던 빨간 수제화를 신고 오버핏 청 재킷을 입은 다음 책 한 두 권을 두꺼운 파일과 함께 끼어준다. 조다쉬 청바지나 써지오 바란테는 아니지만 보세에서 산 핏좋은 청바지를 딱 붙여 입고 대문 밖을 나서는 날은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층을 내는 헤어스타일이 유행하면서 숱이 많아서 사자머리를 감당할 수 없던 나 역시 사자머리에 도전할 수 있었는데 고난도의 드라이 기술을 익히느라고 드라이 빗도 여러 개 사고 앞머리도 참 많이 태웠던 것 같다. 머리가 잘 된 날은 괜히 집에 들어가기가 아쉬워 도서관 앞을 얼쩡거려도 보고 교내를 배회하기도 했다.          



층 낸 사자머리와 스트레이트 파마를 오가며 나름 나의 멋이라는 걸 점차 장착하기 시작한 2학년, 어제 못다 한 전공 과제를 하느라고 모처럼 도서관 빈자리라도 찾을까 하여 혼자서 급히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던 참이었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저기 혹시..." 누군가가 갑자기 나를 불러 세웠다. "네에?" 처음 보는 그를 힐끔 쳐다보니 마음 한구석에 짚이는 데가 있었다. 그날 마침 나는 어제 한 스트레이트 파마에 밸런스를 맞추느라고 아끼던 자주색 투피스 정장을 입고 있었고 바람 부는 날 구두까지 갖춰 신은 사람은 주변에 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페스티벌 파트너를 구하지 못하여 소위 도서관 헌팅이라도 하려고 그 앞을 배회했었나 보다. 거절하기가 쉽지 않은 그의 비주얼도 한 몫 했지만, 오늘 같은 바람 부는 날 스커트정장을 입은 괜찮은(?) 파트너 구하기는 하늘에 별 따기임을 알고 있었기에 기꺼이 그 동창회 페스티벌 파트너 헌팅에 응해준 것은 물론이다. 그는 경제학과 3학년 복학생이었는데 내 또래의 남학생들이 자리에 와서 '형수님' 어쩌구 너스레를 떠는 통에 민망해져서 당일체험으로 관계의 막을 내렸지만 남자들의 고등학교 선후배간의 예의를 체험한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 헌팅당한 페스티벌 체험기는 다음날 친구들과의 수다에 흥미진진한 얘깃거리가 되었음은 당연하다.  역시 노력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았다!    


      

외출 한 번에 준비 시간이 기본 2시간! 헤어연출에 1시간, 메이크업에 30분, 옷 입어 보고 가방과 신발을 고르는데 30분! 불특정 다수를 위한 나의 외출 준비 시간은 포기할 수 없는 투자였다. 당연히 이러고 학교를 가자니 1교시가 있는 날은 진짜 힘들 수밖에! 1교시 수업은 흠모하던 젊은 남자 교수님이었는데, 그 시간에 두어 번 빠졌더니 어느 날은 알지도 못하는 문제를 풀어야 하는 데 나를 지명하셔서 쩔쩔매기도 했다. 안 배웠으니 알리가 없다! 대학생들은 복습을 안 한다는 건 알려진 사실!  



지각생에 대한  그 분의 소심한 복수전이었을까? 중고 시절이면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참을 수 없는 망신이었겠지만 대학생활 1년만에 간이 커져서 웬만한 창피는 버틸만 했다. 그러나 2번은 그 꼴을 당하기 싫어서 1교시 수업은 새벽에 일어나서  준비를 했고, 후문에서 합동강의실까지 그 뾰족구두를 신고 전속력으로 뛰어갔다.   

    

   

그분은 요점을 잘 짚어주는 분이었는데 그때 배운 음성학은 다른 데선 배우기 어려운 발음을 가르치는데 알아두어야 할 꿀팁이 많았다. 전공 성적으로 발령 순위가 결정되던 때여서 시험기간만큼은 고등학생처럼 코피 터지게 열공해야 했고, 평소에도 노트 필기와 과 친구들과의 스터디로 미리 대비해야 했다. 어떻게 그렇게 부지런하게 살 수 있었는지~~ 공부도 미모도 포기 못하고 뭐든 나름 치열하게 살았던 날이 그땐 몰랐지만 젊으니까 가능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운이 좋게도 대학 공부에 바친 시간이 조기 취업으로 보상이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사실 졸업이 그리 두렵지는 않았다. 기다림 후에 취업을 보장받을 수 있는 상황이라서 그랬을 테지. 이제 와 돌아보니 더할 수 없이 혜택받은 학창시절이었다. 가끔 교내 커피 자판기에서 믹스커피를 뽑아 들고 벤치에 앉아 깔깔거리고 수다 떨던 그 시절의 친구들이 그립다. 구두 소리에 교수님이 나의 지각사실을 발견할 새라 살금살금 들어가서 고개 숙이고 있는데 갑자기 문제 풀 사람으로 내 이름이 호명되던 날, 그 아득해진 순간도 잊을 수 없다. 그때 나는 일찍 일어나고도 미모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외출 준비에 허비한 시간을 후회했을까?




정작 교사가 되고 나서야 이 지각생들과의 기나 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때마다 나는 반은 달래고 반은 눈을 치켜뜨면서 말하곤 했다. "내가 모르는 게 아니야! 그래도 매일 지각은 아니지! 미모를 위한 노력까지 하려면 더 일찍 일어나야지! 나도 2시간 더 일찍 일어났어. " 잠도 자야 하고 미모도 챙겨야 하는 제자들을 혼내면서 나의 지각 경험도 좋은 자산이 되어 주었다. 예뻐지고 싶다는 게 죄는 아니니까!



경험해 보지 않으면 누군가를 깊이 이해할 수가 없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나를 가꾸어 보고자 했던 그때 그 시절 사자머리 체험도 알고 보니 좋은 자산이었다. 오래 지각하는 얘들은 아직도 머리 만드는 스킬을 습득 못한 것이다. 든 경험은 잘 쓰이기만 하면 다 자산이다!             


<손그림 1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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