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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느 Aug 10. 2021

찬란한 여름의 기억


올해처럼 폭염에 시달리며 찜통더위에 연일 지치기 전까지 늘 여름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리즈 시절 다소 마른 편이었던 나는 추위를 많이 탔기 때문에 한겨울에 두꺼운 옷을 입고 외출하는 것이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여름은 가방을 무겁게 챙기지 않고도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있고 늦게까지 해가 걸려 있어 퇴근 후에도 여유롭게 시간을 즐길 수 있어 좋았다. 슬리브리스 셔츠에 반바지, 하늘거리는 시폰 원피스를 입고 챙 넓은 모자를 한 손에 쥐고 선글라스에 한껏 멋을 낸 친구들과 여행지에서 사진을 남기는 것도 여름을 기다리던 이유 중 하나였다.      


결혼 이후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후에는 달라졌을까? 겨울은 차가운 한파에 두꺼운 코트의 옷깃을 여며 가며 걷게 되고, 해가 빨리 지고 나면 왠지 워킹맘의 발걸음이 빨라지게 마련이다. 실내에 종일 갇혀 있던 아이를 찾아서 집에 데려 와야 하고, 저녁을 먹고 아이와 실외에서 놀아주기엔 날이 어둡고 추웠다. 그런데 여름은 퇴근 후에도 늦게까지 해가 높이 떠 있다. 아이들 손을 잡고 아파트 주변 놀이터에서 모래놀이를 해도 좋고, 근처 어린이 공원에서 킥보드를 타게 해 주어도 한참은 밖에서 놀다 들어가도 된다.    

  

여름 늦은 오후엔 퇴근하면서 어린이집에서 기다리던 아이들 손목을 양 쪽에 나란히 잡고 나왔다. 큰 아이는 방과 후 프로그램을 어린이집에서 진행하던 중이고, 할머니 집에서 막 데려 온 이후부터 내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는 아들은 4살 이후부터 종일반이었다. 내가 현관문을 열고 두 아이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엄마아!’를 외치며 아들아이가 먼저 가방을 한 손에 쥐고 바닥에 끌며 현관으로 뛰듯이 나왔다.      


낮에 일찍 엄마가 데리러 오는 아이들이 가방을 메고 집에 갈 때마다, 같이 따라 나와서 어린이집 문 앞에서 서성거리며 초조하게 엄마를 기다렸던 아들이 폴짝폴짝 뛰면서 나를 반기는 모습이 짠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현관에 가방을 던지고 각자 스카이 콩콩과 킥보드를 타고 쏜살같이 나간다. 두 아이의 바퀴 달린 신발을 챙겨서 가방에 넣은 나는 아이들 뒤를 쫓아가느라 정신이 없다. 아파트 옆 어린이 공원을 제 집 마당처럼 잘 아는 아이들인지라 엄마를 따라갈 필요도 없는 것이다.      


숨 가쁘게 공원에 도착해서 벤치에 앉아 숨을 돌리면 어느새 바퀴 신발로 갈아 신은 아이들이 쏜살같이 언덕을 내려간다. “와아아!” 조금 떨어진 벤치에 앉은 나는 박수를 치며 넘어지지 않고 잘 내려온 아들에게 두 팔을 번쩍 들고 입을 크게 벌린 채, 깜짝 놀랐다는 표시로, 눈을 크게 뜬 다음 엄지 척 매우 감탄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엄마! 봐아! 두 바퀴야! “ 용케 어린것이 넘어지지도 않고 잘만 언덕을 내려오는데 그래도 안심할 수 없다. 그 옆으로 과속하는 형아들이 있기 때문에. ”동생 잘 봐! “ 나는 연신 딸에게 큰소리를 질러대고 있다.


혼자 공원에 오기 싫어하던 딸이 동생을 데려 온 뒤부터는 어깨에 힘을 주고 놀이터로 간다. ”누우나! “ 아들이 부르자 한 손을 동생에게 내어준다. 벤치 뒤로 고개를 돌려 보니 둘이서 보조를 맞추며 손 잡고 언덕을 힘겹게 올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조심해! “ 외쳐 보지만 들리는지 모르겠고, 이윽고 신나게 내려오는 쓰릴 절정 커브길! 둘 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뗄 새도 없이 평지로 무사히 내려온다.    

  

행여 옆에 있는 큰 아이들과 부딪칠 세라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는 나도 아이들의 동선을 눈으로 따라 가느라고 나름 바쁘다. 집에 돌아오면 목이 뻐근해진다. 아이들과 여러 바퀴를 돌았기 때문이다. 그런 날은 남편이 공원으로 퇴근을 했다. 우리는 가끔 공원 옆에서 입안에서 바삭바삭 씹히는 핫 프라이드치킨과 김이 서리는 차가운 캔 맥주를 나누어 마시며 한여름 무더위를 달랬다. 치킨 한 조각을 후다닥 뜯고 시원한 사이다 거품을 한 모금 마신 아이들은 캄캄해질 때까지 벤치로 돌아올 생각이 없다.


내 머릿속 그 기억의 저편,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요즘 문득문득 그리워진다. 우리들의 찬란한 시간을 얼마나 기억해줄지 모르는 아들은 지금 강원도 어느 초소에서 두 눈 크게 뜨고 전방을 주시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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