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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느 Nov 20. 2020

우리 탓이 아니야

가사분담 전쟁 2


결혼을 하고 나면 소위 기선을 누가 먼저 잡느냐에 따라 평생 힘들게 살 수도 있고 편하게 살 수도 있다고 한다. 경력차 주부인 직장동료들이 나에게 조언을 해 주었다. 그렇게 네가 다 해 보릇 하면 큰일 난다고. 부지런 떨지 말고 남편이 안 하면 너도 안 하면 된다고 한 마디씩들 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하자고 하지 않는 일은 눈 감고 사는 게 속 편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지저분하게 대충 살라고...


이제 시작인데 남편을 내 사람으로 바꾸어야지. 옳지 않은 쪽으로 살고 싶지는 않다는 게 그 당시 젊은 새댁인 나의 삶의 철학이었다. 지금까지는 시부모님의 철학대로 성장했겠지만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결혼을 통해서  동반 성장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남편의 좋은 점은 내가 배우고 우리 집의 좋은 가풍은 남편이 받고... 뭐 이런 소신을 가졌던 것 같다.


남편을 스캔해 보니 잘 먹는 사람이고, 먹으면 살이 쉽게 잘 찔 타입인데 집안에서 데굴거리는 걸 좋아한다면 앞으로 이 사람의 건강상태도 좋을 리가 없다. 운동을 싫어한다면 집에서라도 움직이게 만들어야지. 덤으로 나도 수고를 덜고... 직장에서 돌아온 나도 기분 좋게 쉬고 우리 집에는 사랑이 넘치는 평화가 오겠지. 뭐 이런 구상이었다. 그렇게 해서 남편의 말대로 남편이 집에서 쉬는 꼴을 못 보는  나의 가사분담 작전이 시작되었다.




내가 바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먼저 남편과 나의 상황을 분석해야 했다. 외적 내적 요인을 다 살펴야 한다.


남녀관계에서 공감을 사용하는 열쇠는 나와는 다를 수 밖에 없는 상대의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있다. 무엇이 사랑이나 관심, 배려의 징표인지 상대와 나는 서로 생각이 다르다. 가치관은 사람이 의식적으로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대체로 어린 시절에 저절로 형성된다. 상대의 가치관을 늘 염두에 둔다면 흔히 방어적으로 돌변할 만한 순간에도 상대의 영혼과 관점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인간본성의 법칙 p114-



우선 남편이 왜 집안일을 안 하려고 하는가? 그것부터 따져 보아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남편은 매우 다정한 사람이었다. 식당에서 겨울 외투를 입고 벗을 때마다 내 외투를 입혀주고, 내 의자를 항상 먼저 빼 주고 나서 앉는 사람이었다. 길거리에 나가면 항상 나를 길 안쪽으로 향하게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덩치 큰 사람이 바람도 막아주고 주변을 경계해 주니 남편과 같이 다니면 어디나 보디가드와 있는 것처럼 안심이었다. 맛있는 반찬은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항상 내 밥 위에 먼저 올려주었다.


결혼하고 나서 처음 시댁에서 밥을 먹는데 2명의 여동생과 남동생, 부모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명란젓, 갈치조림 등 내가 쳐다만 봐도 뚝 떼서 내 밥 위에 올려주는 바람에 처음엔 몹시 쑥스러웠다. 내 손에 든 것은 다 먹은 종이컵 하나도 자기가 받아서 쓰레기통에 넣어주는 친절한 신사였다. 누군가와 언성을 높이는 일이 별로 없는 차분하고 조리 있게 자기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집에서는 무조건 쉬고 싶다는 것만 빼놓고는~ 여기까지가 남편이 스스로 정한 좋은 남편의 기대치였다. 애인이라면 당연 합격이다.


그는 집에서 편안하게 쉬는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남편은 집에서 누군가에게 심부름을 할 필요가 없었다. 부지런한 어머니와 두 여동생이 오빠에게 늘 맛있는 밥상과 간식을 가져다주었고 밖에서 열심히 공부만 해 다오~ 집안의 기둥에 맞는 대접을 받았다. 시어머님도 당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러 다니셨는데 놀랍게도 아침 준비를 완벽하게 하고 밤에 돌아오면 주저 없이 저녁을 짓고 빨래를 돌리고 가족들을 챙기고 계셨다. 언제 봐도 늘 밝은 얼굴로 맛갈스런 음식을 상에 가득 차려내는 분이었다.


 남편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끊임없이 희생하면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을 터였다. 시누이들도 다 일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엄마가 부엌에 있으면 딸들도 부엌에서 엄마를 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객지에서 한 번씩 집에 오는 아들에게 아무것도 안 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남편은 시아버지와 더불어 이 집에서 대접받는 사람이었다. 시동생 역시 대학생으로 집에서는 심부름을 잘 시키는 것 같지 않았다. 한 마디로 이 집 남자들은 집에서 쉬는 사람들이었다.


그럼 우리 집은 어땠을까? 장사를 하던 우리 부모님은 아버지가 밖에 나가시면 엄마는 가게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외출이 힘들었다. 나와 내 남동생이 엄마의 심부름으로 저녁 찬거리를 사러 자주 나갔다. 할머니가 고등학교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때까지는 할머니가  집안일을 많이 하셨다. 내가 중학교 때 가정 시간에 배운 요리를 한답시고 냄비를 몇 개 태우고 다림질을 한다고 엄마가 아끼던 상보를 눌려 버린 후로는 거의 나 역시 요리며 다림질, 세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내가 엄마 옆에서 뜨개질을 하는 것보다는 공부를 열심히 해 주기를 바라셨다. 시험을 보고 나서 성적이 내려가면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질까 겁이 날 정도로 내 공부에 욕심이 많으셨던 분이다. 집안이 어렵다기 보다도 여자를 공부시키지 않는 풍습 때문에 초등학교밖에 못 다닌 엄마는 뭐든 배우는 데 열심이셨고 내가 가정주부가 아니라 좀 더 멋진 직업을 가진 당당한 사회인이 되기를 바라셨다.


 그렇지만 투자는 항상 오빠에게 나는 적당한 선에 그쳤고 나에게는 한 살 위인 오빠의 유학을 위해서 저렴한 학비의 사범대학을 권했지만 남동생의 대학교 학비는 당연했던 그런 분들이었다. 크게 보면 우리 집 역시 다르지 않았다. 엄마가 집을 비우면 오빠와 남동생의 밥을 챙겨주는 것은 내 역할이었고 주인 없는 가게를 보는 것도 항상 나였으며, 엄마는 오빠에게는 어떤 잔심부름도 잘 시키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나와 남동생이 오빠의 심부름을 도맡아 해 주기도 했다. 라면은 내가 끓이고 동생은 빌린 무협지를 대신 반환해 주는 역할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 시절 어느 집이나 아들인 장남의 권위는 지켜졌고 딸은 엄마 역할을 조금씩 나누어 주었던 모양이다. 그 당시 어머니들은 아들은 남편보다 훨씬 성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고 딸은 적당히 공부시켜서 좋은 일자리 얻어서 시집가서 기죽지 않고 잘 살아주기를 바랐다고 할까? 자녀를 대학 공부시키는 것이 일생의 목표였던 그분들은 생활고로 남편과 다투어보지 않은 집이 우리 집 주변에는 많지 않았다. 아버지가 소위 인맥 넓히기와 외상값 수금이니 도매점에 물건을 구입하러 가는 사장님의 역할을 할 때, 엄마는 살림과 가게종업원 역할을 병행했다. 시어머니 역시 남편의 월급에 보탬이 될까 하여 온갖 집에서 하는 부업에 식당 주방보조일이며 닥치는 대로 돈 는 일에 나섰던 분이다.


평생 생활고에 시달렸던 그분들에게 따박따박 월급을 가져오는 며느리는 내 아들에게 맺어주고 싶은 일등 며느리감이었다. 공무원, 교사, 약사, 의사 이런 전문직 며느리를 맞으면 다들 그 집 며느리를 잘 보았다고 했다. 밥 잘하고 살림 잘하는 며느리는 평범한 며느리였을 뿐이었다. 적어도 며느리를 들일 때는 서민층에선 다 경제적 가치를 높게 생각했다.


한 가지 문제는 일하는 며느리를 맞이하고 싶은 그분들이 일하는 여자와 혼하게 될 본인의 아들을 전혀 준비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사분담의 가장 큰 화두인 요리와 청소를 아들에게 시키는 어머니를 내 주위에서는 별로 보지 못했다. 인기 드라마에서는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안사람에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며느리는 밖에서 무슨 일을 하든 집에서 예쁜 앞치마를 매고 시어머니 옆에서 다소곳이 요리를 했으며 아침에는 남편의 넥타이를 매어주고 있었다.


여고시절 저녁을 먹고 야간 자율학습을 하러 갈 때 창밖으로 노을이 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짝꿍이 그런 말을 했다."이까짓게 다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시집 가면 그만인데..." 공부 잘하는 문과 여학생들은 대개 교대나 사대에 진학했고 그들은 공무원이 꿈이었다. 대학에 가 보니 키 크고 외모에 자신감 있는 성실한 여학생들은 영어회화 학원에 다니면서 승무원이 되는 게 꿈이었다. 물론 그런 속에서도 남다른 꿈과 포부를 가지고 정진하여 멋지게 자신만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나중에 눈에 보이기 시작했지만...


업에 대한 접근에서도 우리 여학생들은 다소 소극적인 것이 사실이었다. 남자들이 고시나 행시, 대기업 입사와 고소득 전문직의 꿈을 꾸며, 도서관에서 취업준비를 시작할 때, 취업이 어느 정도 보장된 나와 취업이 결혼의 필수조건이 아니었던 평범한 내 여자친구들은 학교 시험기간이 아니면 옥수수빵을 뜯으며 찻집에 앉아 친구의 연애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미팅이 화두였고 패션이 관심이었다. 그보다 더 잘 될 수도 있었는데 우리의 꿈은 날이 갈수록 작고 초라해져 갔다.


전문직으로 성공하는 것보다는 성공하는 남자의 아내가 되어서 적당히 하다가 그만두는 것이 최선인 것처럼 여겨졌다. 평생 부부가 함께 일해야 남들처럼 살아볼까 말까 하는 사회가 오고 있음을 우리도 몰랐고 나도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며느리가 평생 일해주기를 바랐던 시어머니조차 가사분담으로 아들의 결혼생활이 삐걱거릴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아낌없이 주는 어머니는 있을지 모르지만 아내가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될 수는 없다.


남편은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는 가족 구성원 중에 함께 집안 일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어른이니까 일하는 아내와 산다면 당연히 집에서도 나눌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남편과 나의 자라온 사회적 환경을 살펴보니 남편이 가사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남편의 탓이라고 볼 수만은 없겠다 싶었다. 남편은 결혼 전 일하는 여자와 결혼을 할지를 두고 고민을 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시어머니는 공무원인 나를 적극 밀었고 가진 게 없다고 판단한 남편은 나의 직업에 높은 점수를 주었던 것이다.


 일하는 여자와 결혼하면 집에서 편안하게만은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안 들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저 잘해 주면 되는 거지 뭐. 남편의 의식은 그렇게 흐르고 있었을 것이고 외관상 그는  매너가 좋은 남자였다. 남편은 자기의 일은 본업, 내 일은 부업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내가 그만두겠다고 하면 말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남편의 의식 깊은 곳에서는 가장으로 책임을 다 하기 위해서 평생 밖에서 번 아웃할 본인이 집에서 당당하게 쉴 권리가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럼 나는 어떻게 남편의 의식에 변화를 가져와야 되나?  내 작전은 이랬다.


첫째, 나는 남편에게 내가 일을 평생 하고 싶고 내 일에 열정이 있음을 알려야 했다. 

남편은 직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과묵한 사람이었지만, 나는 늘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며 업무 이야기를 남편에게 털어놓고 가끔은 그에게 조언을 구했다. 남편은 자신이 모르던 학교 안 이야기에 몰입하여 내 이야기에 맞장구도 쳐 주고 성질 나쁜 아이에게 당한 이야기에 같이 흥분했다가, 상사의 부당한 업무지시에 내게 깨알 팁을 제시해 주기도 했다. 학교 행사에서 재미있었던 이야기며, 나를 웃게 만들었던 아이들의 재기 발랄한 수업시간의 에피소드에 남편은 점차 빠져 들었다.


시험지 원안을 작성하고 채점하는 기간에는 아내의 스트레스가 급증한다는 것을 알고 가능한 내 기분을 맞춰주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집에 와서 끙끙대는 나를 보면 간단히 비빔밥을 만들어 나에게 먹어보라고 가져오기 시작했다. 밥을 먹고 나면 과일을 좋아하던 그는 사과를 깎아서 내밀고 커피를 타 주고 설거지도 본인이 맡아서 해 주었다. 한 번 리듬이 끊어지면 문제가 안 풀린다고 하고 밤을 새기도 하고, 채점에 집중하지 않으면 누군가의 인생에 큰 불행을 끼칠 수도 있다고 내가 협박을 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내가 자기 못지않게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임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 일을 계속할 사람이라는 것도.



둘째, 내 직업의 특수성을 알리고 남편의 협조가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남편은 종일 의자에 앉아 사무를 보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서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정해진 수업시간에는 반드시 한 시간 내내 서서 일해야 하는 사람이었고 아침 자습시간과 청소시간에도 당연히 서서 지도하는 사람임을 알려주었다. 집에 와서 저녁을 짓고 설거지까지 하고 나면 하루 종일 내가 몇 시간 서 있게 되는지 계산도 해 주었다.


그는 학창 시절 교무실에 앉아 담소를 즐기는 선생님들을 자주 봐왔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의 직업의 애환을 남편도 알 필요가 있었다.

결혼 이후 곧 임신을 해서 배가 부른 나는 코끼리 다리처럼 다리가 붓기 시작했는데, 정해진 수업 이외에도 영재반이니 보충수업이니 해서 플러스 추가시간을 더 받은 나는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임신 중기가 되면서 다리와 손발에 부종이 생기기 시작하니 남편은 나를 몹시 걱정하면서 안쓰러워했다.


집에만 오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앉아 있으라'라고 나를 말렸다. 그냥 서 있어도 오래 서 있으면 다리가 아프다면서 배가 남산만 하니 얼마나 힘들겠느냐고 진심 이해를 해 주었고 당연 요리며 청소는 임신기간 남편의 몫이 되었다. 입덧으로 제대로 먹을 게 없었을 때 객지에서 살던 우리는 친정과 시댁 찬스도 없이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는데, 첫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는 내가 유일하게 먹을 수 있었던 칼국수를 사러 다녔고, 둘째를 임신하고 있었을 때는 수산시장에서 신선한 고등어와 갈치를 사 와서 매일 내 저녁을 차려 주었다. 생선구이가 남편이 부담 없이 할 줄 아는 요리였고, 가장 태아와 산모에게 좋다고 생각해서였을 거다.



셋째, 남편이 가사에 참여할 때 긍정적인 멘트를 마구 날리자. 그가 얼마나 도움이 되고 있는지 칭찬을 해 주자.

남편에게 설거지를 분담시키고 나서 일이다. 남편은 밥 먹고 설거지할 생각 하면 밥맛이 떨어진다고 했다. 한 상 가득히 차려주면 설거지할 그릇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설거지 그릇이 늘어난다고 대충 해 먹자고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본인은 김치찌개 하나면 된다나.


 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가족의 건강을 위해서 그럴 수는 없다고 나는 못 박았다.  그래도 처음부터 몰아치는 것은 아닌듯해서 남편이 오기 전에 프라이팬, 큰 냄비며 손질한 채소는 치워놓는 매너를 발휘해 보았다. 가끔 남편이 설거지를 하고 나면 어디 한 군데는 꼭 부족한 데가 보였다. 기름 묻은 프라이팬은 그대로 두고 설거지가 끝났다고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딱 설거지만 하고 주변 정리는 미흡할 때가 많았다.


처음엔 잔소리를 하고 싶어 근질거렸고 잔소리를 해 보니 반응이 좋지 않았다. 잔소리를 엄청 싫어하는 그는 "그럼 네가 하든지" 그러면서 담배 한 개비 물고 베란다로 쌩~~ 하고 나가버리니 나만 손해였다.  가급적 남편이 처음 가사에 참여할 때는 모른척해야 한다. 그는 나보다 경험이 부족하니까. 하다못해 나는 '가정'에 '가사"까지 배웠지 않나? (왜 '가정'을 여학생에게만 가르쳤을까? 이것부터가 교육의 성차별이었다) 부족한 건 내가 보완하면 된다.


 잔소리 대신 남편이 한 번 설거지를 하고 나면 그 꼼꼼하고 빈틈없는 솜씨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신이 하고 나면 뭔가 달라." 그랬더니 남편은 청소 역시 했다 하면 대청소처럼 구석구석 깨끗하게 먼지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하고 나면 청소기까지 분해해서 먼지를 제거하고 내가 이런 일에 소홀함을 나무라기도 했다. 그 건 나에게 엄청난 반사이익이었다. 후에 우리의 이 가사분담에 대한 갈등을 알았는지 시누이가 집들이 선물로 커다란 식기세척기를 선물했는데 이건 내 선물이 아니라 오빠를 위한  선물이었음을 알았을까 싶다.



넷째, 아내의 직업으로 얻는 경제적 혜택을 수시로 상기시켜 주자.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기 싫어하는 남편은 대출받을 일이 있어도 친구나 가족에게 보증 부탁할 일이 없었다. 안정된 직장이 있던 내가 남편의 보증을 선 것이다. 우리는 가진 것이 별로 없이 시작해서 내 집 마련을 위해서 부득이 여기저기 대출을 받아야 했는데 나는 시중은행보다 낮은 내 연금을 담보로 신용대출을 해 주고 아파트 중도금을 위해 기꺼이 최저생활비로 살림을 했으며, 내 품위유지비는 최소한으로 하고 살았다.


결혼 축하금으로 신혼부부에게 주던 공제회의 낮은 금리를 얻어서 자동차 할부금의 선금을 대출하고, 우리는 자동차를 샀고 매주 어디나 갈 수 있게 되었다. 월세가 싼 옥탑방에서 김치찌개 하나로 매일 저녁을 때우던 구두쇠 청년은 결혼과 더불어 중산층으로 단숨에 진입했다. 물론 이 건 내가 남편에게 자주 해 주는 해석이다. 함께 일하는 아내를 둔 덕에 남편은 돈 걱정을 별로 해 보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남편 월급은 공무원인 나를 금방 추월했지만 혼자서는 대출을 갚을 일이 까마득했을 남편은 돈 갚을 걱정 없이 나와 함께 새 아파트를 보러 다녔다.




위에 언급한 내 작전은 남편의 가사분담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내는데 적잖이 도움이 되었다. 그 후 아이가 태어나고 나는 가사분담을 다시 하게 된다. 서로 좋아하는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기준은 그 거였다. 남편은 육아와 청소, 나는 요리와 세탁. 우리 부부는 차 한 대로 함께 출근했기 때문에 아이를 데려다주는 일은 같이 할 수 있어서 힘이 덜 들었다. 남편은 집안일은 대충 쉬엄쉬엄 하고 싶어 했지만 조금 늦은 결혼에 얻은 딸은 무척 이뻐라 했다. 잠을 못 자면 수업시간에 엉뚱한 소리 하다가 실력 없는 교사로 아이들에게 찍힌다고 했더니 한밤중에 깬 딸아이의 우유병은 남편의 임무가 되었다. 남편도 내가 실력 없는 교사로 평생 일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아빠와 함께 놀면 공간지각력과 수리력이 좋아진다고 들은 교육학 이론은 다 동원해서 설명하기 시작했고, 어차피 요리와 설거지며 정리하는 일이 싫었던 남편은 아이와 놀아주는 일을 더 마음에 들어했다. 딸은 '엄마'보다 '아빠'를 먼저 배우고 컸다. 아프면 아빠를 먼저 찾기 시작했고 아빠 품에 안겨서 감기 정도는 뚝딱 나았다.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으면 아빠와 함께 만든 블록 동물을 가지고 와서 딸아이는 자랑하곤 했는데 소꿉놀이 대신 만들기를 많이 해서 그런지 커서도 설명서를 보고 만들기를 좋아하고 뚝딱 잘 해내곤 했다. 손끝이 야무졌고 일처리가 꼼꼼했다. 아빠와 놀면서 일하는 아빠의 장점을 많이 물려받았다.


남편이 늘 하는 말이 있다. 뭔가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잘못한 게 되어 있다고... 그렇게 설명하고 푸념도 해 보고 비전을 제시하면서 남편은 이제 뭐든 나와 함께 나누는 진정한 동반자가 된 듯하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했다. 아이를 돌봐 주는 시간이 줄면서 남편의 가사는 가장 먼저 해방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가사분담을 또 할 필요는 없었다.  아내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이가 되니 그는 항상 내 건강을 걱정했고 알아서 일을 찾아서 해 주더라는~~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살게 된다.


내가 빨래를 꺼내면 남편이 빨랫줄에 널고, 빨래를 개기 시작하면 얼른 남편이 와서 돕는다. 요리를 하면 남편은 항상 옆에서 보조를 하고 식탁 차리는 것을 돕고 밥하느라 고생했다고 설거지는 남편이 자기 몫으로 가져갔다. 남편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나는 식탁을 치우고 있고, 내가 먼저 끝내고 나서 소파에 앉아 있으면 커피머신에서 커피를 뽑아서 남편은 소파에 앉은 내 손가락에 끼어준다. 일어나지 말라는 뜻이다. 남편은  음식물쓰레기를 비우고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일도 도맡아 주었다. 음식물 찌꺼기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남편과 나의 체면을 생각해서 나는 분쇄기를 샀고 우리의 가사를 도와줄 건조기도 우겨서 샀다.


 살다가 보니 세상의 변화도 도움이 되었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가 떨어진다고 질색하던 우리 할머니들과 아들이 부엌에 들어오는 걸 싫어하던 어머니들도 이건 어쩔 수가 없다. 백종원의 요리 프로그램 덕분에 요리하는 남자의 매력에 빠진 남편은 이제 김치찌개와 김치전, 고기 굽기 등 잘하는 요리 품목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소질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요리를 권할 걸 싶을 정도다. 엄마 요리 솜씨가 딸에게만 내림된다고 생각하나? 맛있는 걸 먹어 본 사람이 간도 잘 보는 법!


내가 없어도 아이들 밥은 남편이 잘 요리해서 먹인다. 남편이 집안일을 내 일처럼 하게 되니 '가사분담'은 우리 집에서 더 이상 이슈가 아니었다. 서로 상대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하면 분담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같이 쉬고 같이 일한다. 우리는 어느새 한 사람이 일하고 있을 때, 혼자 쉬면 미안한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지금은 남편이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살면서 남편보다 더 고맙고 감사한 사람은 없었다. 우리 아이들은 선물에 따라 온 덤이다. 그 얘들은 또 다른 누군가의 생애 최고의 선물이 되어주겠지.


결혼생활에서 사랑보다 더 절실한 건 서로 필요한 사람이 되어주는 것이다.


나는 30년 이상 누군가를 가르치면서 살아왔지만, 살면서 내가 누군가의 의식을 바꾸고 나를 설명하고 설득하는 데 가장 정성과 시간을 들인 사람은 남편이다. 그리고 그 건 분명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남편도 나도 이 생에서는 결혼이 처음이지 않나? 그도 집안일이라곤 통 배우지 못했고 집안일을 나누어해야 한다고 가르쳐 준 사람도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한 마디로 이게 다 우리 잘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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