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에서 저자의 닉네임인 <밤 호수>의 찐 이웃으로 만나 그녀의 출판소식에 열렬히 응원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드디어 그녀의 블로그 글이 책으로 출간되었다.
저자의 책을 덮자마자 나 역시 다른 이웃님들처럼 나만의 소중한 추억열차를 타고 70 80 시절로 애틋한 여행을 떠났다. 그 여행에서 수진이같이 순수했던 나를 만났고 수진이처럼 황홀하고 멋지고 뿌듯한 추억을 한 아름 간직할 수 있어서 이번 생도 좋았노라 싶어졌다.
책 제목은 임수진 작가가 직접 블로그 이웃들에게 공모하여 엄선한 <안녕, 나의 한옥집>이다. 한국어 어문규정에 의하면 '한옥'이 맞겠지만 작가가 그리는 '한옥집'은 어린 시절 작가의 세상을 표현하는 하나의 고유명사로 보고 동일한 의미가 겹치는 듯 보이는 '옥'과 '집'을 동시에 쓰기로 했던 모양이다.
그녀가 한옥을 이야기할 때 언급되던 공주의 고향집 부근이 그림 지도로 떡 하니 표지에 그려져 있으니 상상의 날개를 펴기가 더 좋은 것 같다. 언젠가 이 책이 공주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금싸라기 캐듯 추억을 하나 둘 캐는 이정표가 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고 나서 언젠가 공주에 가면 골목길 끝에 떡하니 보인다는 그 한옥을 찾아 가 보고 싶다. 제민천의 흐르는 물, 중앙서림, 마리아 수예점. 바른손 팬시점, 아트박스 그런 가게들을 어린 수진이가 되어 한 번 소녀감성으로 찾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
그녀는 절절한 그리움을 담아 한옥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책을 읽어보니 저자는 불과 10살 남짓의 순수한 감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중앙서림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끼고 종일 한옥의 여기저기를 쏘다니면서 상상의 날개를 펴던 수진이의 머릿속에 이 책의 대략의 이야기가 다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책을 읽다 보면 그 세밀한 기억이 놀랍고 어린 소녀의 관찰력과 집중력이 이 정도인가 싶을 정도이다. 또는 그녀에게 그 시절의 모든 것이 너무나 좋아서 영혼에 각인되었다고 하는 게 맞겠지~ 글은 중년의 임수진이 썼으되 감성은 어린 수진이의 가슴에서 나온 책이다.
나는 불운하게도 그 정도까지 내려가는 기억은 이제 별로 선명하지가 않기 때문에 이 평범함 속에서 진심을 캐낼 수 있는 특별함이야 말로 작가의 소양이 아닌가 싶어 진다. 그리고 우리의 유년 시절의 행복했던 기억의 조각들도 잘 꺼내어 붙이면 이렇게 멋진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도 품게 된다.
할머니의 요리비결인 장독대를 마지막으로 깨고 마지막에는 서울시 혜화동 주민으로 학창 시절을 마쳤다는 작가는 사실 서울에서 산 시간의 훨씬 더 많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친구를 사귀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이야깃거리야 훨씬 더 풍성할 텐데...
그럼에도 제일 먼저 그 유년시절의 기억을 지금까지 그토록 선명하게 붙들고 이 책의 서문에 있다시피 '내 이야기는 그곳에서 시작되었다'로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그녀가 스스로의 뿌리를 백제의 옛 도읍지이며 어린 수진이의 프라이드였던 공주에서 할아버지가 직접 지은 '한옥'에서 찾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빨강머리 앤이 그린 게이블즈에서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갔듯이 작가에게는 그 출발점이 이 집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녀의 영혼에 남다른 '나'의 정체성을 심어 준 그곳! 책을 읽고 나면 70년대에 기와집에 살았던 다수의 중년들에겐 겹치는 그림이 참 많다. 기와지붕을 헐고 그 자리에 양옥집을 올리고 증축하고 개조하면서 우리는 편리해진 삶에 적응하고 난 뒤엔 지난 것들이 누추하고 불편하고 궁상맞았던 것이라고 던져 버렸다!
냉장고가 없었을 땐 어떻게 살았을까?
허리를 구부리고 부엌에서 어찌 밥을 했누?
밥 한 번 차리려면 광이며 뒤뜰이며 집안을 쓸다시피 했겠네.
겨울에는 아랫목이 너무 뜨거워 궁둥이 델 것 같고 손만 내놓으면 추워서 벌벌 떤다니까.
그런데 그랬던 우리가 <삼시 세끼>에 열을 올리고 그 군불 지피는 매력남 옆에서 배춧국에 김 오르는 밥 한 술을 얻어먹으며 평상에 앉아서 붉게 타는 노을을 보고 있으면 참 좋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손만 닿으면 텃밭에 없는 게 없는 그 보들보들하고 부드러운 푸성귀를 바구니 가득 따서 된장에 쌈 싸 먹으면 얼마나 맛날까 그런 기대에 즐거워하면서!!!!
하루 종일 밥 세 끼 짓고 먹고 나면 하루 해가 지는 그런 단조로운 산촌, 어촌 생활을 부러워하면서 홀릭하게 되었다. 며칠 저렇게 살아도 괜찮겠어! 1주일쯤은 좋겠지. 그저 암 걱정 없이 밥 세 끼 먹을 것만 있다면 부른 배를 부여잡고 설거지 마치고 나면 평상에서 밤하늘의 별 감상하며 사는 것이 부러운 팔자인 것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녀의 책을 읽고 나도 기억 속의 내 고향집과 한옥과 많이 닮아 있는 외갓집을 떠올려 보았다. 이런 기억이라도 떠올릴 수 있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아파트에서 키운 내 아이들은 이런 감성을 이해나 할 수 있으려나! 나 역시 유년 시절 양옥으로 개조하기 전에는 기와집 툇마루에 걸터앉아 신발을 벗고 여름에는 벌렁 드러눕던 마루가 있는 집에서 살았다.
마루에서 식구들이 원형상에 둘러앉아 된장국과 고등어구이에 맛있는 저녁을 마치고 나면 할머니가 구수한 누룽지를 가져왔고 물처럼 누룽지를 나누어 먹곤 했던 그 옛날의 우리 집 밥상이 떠오른다. 장날이 되어야 생선을 구경하고 쇠고기 구이보다는 쇠고기 국이 더 보편적이던 시절~ 고기반찬이 없어도 그 식탁엔 한 가득 늘 뭔가 반찬이 풍성했던 것 같다.
방학 때마다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던 외갓집에 외삼촌의 자전거 뒤에 타고 도착하면~~ 소를 키우던 외양간에서 나던 그 구수한 냄새! 그 냄새에 홀려 어느 날 아침은 진짜 먹어보고 싶은 충동까지! 임 작가님의 말처럼 똥 싸 배기될 뻔한 그 어두컴컴한 사랑채 뒤 변소는 왜 그리 깊고 무서운지. 소 외양간이 옆에 있어서 그나마 공포를 덜었지만 볼 일이 아주 급하지 않으면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빠질까 무섭고 그 찌르는 냄새에 정신이 번쩍 나는 곳!
사랑방에서 외할머니는 저녁이면 마실 온 동네 아주머니들과 비단을 하고 나는 그 옆에서 따뜻한 솜 이부자리를 깔고 자는 척하면서 여인네들의 옛날이야기를 참 많이도 얻어 들었다. 외숙모가 여름이면 마당에 있는 샘에서 시원한 물을 한 사발 떠서 미숫가루를 타 주시곤 했는데 어찌나 시원하고 구수한지 아직도 그 시원함의 정체는 지하수이기 때문일까 하고 궁금할 정도.
외숙모가 간식으로 내주시던 김 뿌린 양념간장이 맛갈나던 묵사발이 아직도 아련하다. 김구이, 달걀찜, 나물무침, 된장찌개 등 정갈한 밥상이 나오면 벌떡 일어나서 김 오르는 솥밥을 금방 한 그릇 먹어치우곤 했다. 숙모 옆에서 군불 때는 구경도 하고 옛날이야기도 듣고. 가게도 없는데 어디서 그런 간식이 나오는지 늘 기분 좋게 배가 부르던 외갓집의 정겨운 모습이 기억 한편에서 나를 깨운다.
임수진 님의 이 책은 같은 세대에게는 예전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하나씩 꺼내 보여주는 묘미가 있는 듯하다. 동네 여인네들과 비단을 하면서 밤이 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우던 외할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과 재미있는 예전 이야기를 잠귀로 흘려들으며 그때 그 군불이 뜨끈뜨끈하던 온돌 목의 푹신푹신한 솜이불이 너무 그립고 그립다!
그리고 이제는 한 번쯤 그렇게 다정한 이웃들과 함께 밤마실을 다니고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고 남의 집 일도 내 일처럼 챙기던 그 살뜰함이 다시 찾고 싶은 '귀함'이었음을 알고 조금은 슬프고 아쉬운 마음이 든다. 집은 단지 건물이 아니라 그 집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녹아들어야 진짜 내 집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