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박집을 열기로 결심했을 때, 내 머릿속엔 나름의 그림이 있었다.
20대 대학 시절, 유럽 여행 중 머물렀던 한인민박. 그곳에서 나는 모르는 사람들과도 순식간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낯선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머문다는 이유만으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금세 서로의 여행에 스며들던 그 분위기가 좋았다.
하지만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비대면으로 민박을 운영하게 되었고, 이제는 그런 장면을 보기 힘들어졌다.
그러던 차에, 민박 운영은 정리하고 손님을 받고, 나가면 다시 치우고 청소하는 일을 반복하는 단조로운 루틴이 되어 있었다. 최근에 비대면으로만 이어지던 손님과의 거리가 조금 가까워지는 일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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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에서 예약한 손님이었다.
처음엔 “간단히 요리해 먹을 수 있는 주방이 있을까요?” 같은 문의로 시작하더니, 시간이 갈수록 질문의 난이도가 높아졌다.
어느 날은 손님이 드라마 한 장면을 캡처해 보내왔다. 꼭 가보고 싶은 식당인데, 인터넷 예약은 안 되고 전화로만 예약이 가능하다며 대신 연락해 줄 수 있겠냐는 부탁이었다. 잠깐 망설였다. 이걸 어디까지 도와줘야 하나 싶기도 했고, 내가 굳이 나설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 꼭 가고 싶어요, 사장님!"이라는 메시지 끝에 붙은 간절한 이모티콘을 보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내가 직접 전화를 걸어 예약을 잡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번엔 숙소 근처에서 할 수 있는 액티비티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나는 노을 질 무렵 바다에 나가는 낚싯배를 권했고, 인터넷으로 예약을 진행한 뒤 비용 정산과 입금 확인까지 도맡아 처리하게 됐다. 나는 분명 민박집 사장인데, 어느새 누군가의 여행 전체를 등 뒤에서 밀어주는 가이드가 된 기분이었다.
솔직히 중간에는 귀찮기도 했다. 예약일이 되면 시간과 위치를 다시 안내해야 했고, 혹시나 예약이 잘못된 건 아닐까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민박을 시작하며 다짐했던 '새로운 사람들과의 연결'이라는 초심을 떠올렸다. 누군가에게는 일생에 한 번 뿐일 제주 여행 아닌가.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덜 헤매게 해주는 일, 그 정도의 수고라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얼마나 근사한 일인지 스스로에게 되뇌며 다시 핸드폰을 쥐었다.
손님이 체크인한 이후에도 나의 '랜선 가이드' 임무는 계속됐다. 예약해 둔 식당에 갈 시간이 되면 지도를 보내주고, 배낚시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비유하자면, 어린아이의 첫 심부름을 보내놓고 멀리서 지켜보는 마음이었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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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체크아웃하는 날, 별다른 인사도 없이 조용히 떠났다. 이리저리 신경을 쓴 것에 비해 조금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숙소를 정리하러 갔다. 문을 열자마자 나는 잠시 멍해졌다. 방 안은 내가 본 어떤 손님들의 흔적보다도 정갈했다. 침대 시트는 빳빳하게 펴져 있었고, 주방 집기들도 원래 제 자리에 자로 잰 듯 놓여 있었다. 그리고 거실 테이블 정중앙에 꽤 큼지막한 꾸러미 하나가 놓여 있었다.
싱가포르에서부터 이 무거운 걸 챙겨 왔을 손님의 뒷모습이 그려졌다. 꾸러미 옆에는 정성스럽게 적힌 쪽지가 있었다.
"귀찮은 부탁도 웃으며 도와줘서 정말 고마웠다. 덕분에 제주가 최고의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 문장을 읽는데, 그동안 핸드폰을 붙들고 오가던 번거로운 순간들이 괜히 괜찮아졌다. 내가 건넨 사소한 도움이 누군가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는 사실이 조용히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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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 삶의 인연은 정성 들여 심은 씨앗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런 일들이 쌓여 사람 사이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가는 건 아닐까.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잠깐의 수고와 몇 번의 연락이 오가는 사이에도 서로의 마음이 오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동안 번거롭게 느껴졌던 그 과정도,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선물을 챙겨 나오는데, 끈적한 바닷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바다의 뺨에는 이미 수많은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해가 지고 나면 바다는 금세 어둠에 잠기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푸른빛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내가 손님에게 건넨 사소한 도움과 그가 남기고 간 마음도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남아, 이 공간을 조용히 채워가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처음 경험했던 민박집이 떠올랐다. 별 의미 없다고 여겼던 반복 속에서도, 내가 이 일을 계속할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조금은 귀찮고 수고스럽더라도, 나는 아마 또 기쁜 마음으로 핸드폰을 들고 맛집 주소를 검색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처음 그렸던 민박집의 모습도, 그렇게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