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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 Feb 02. 2018

엄마, 나를 좋아하긴 해?

02/02/2018 <레이디 버드>


내가 우리 나이로 열다섯에서 열여섯을 넘어가던 시기에, 엄마는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었다고 한다. 이런 문장으로 쓰는 이유는, 당시 나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엄마가 우울증을 앓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내가 법적으로 술을 마셔도 되는 나이가 되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학생회장이었는데, 엄마는 학부모들의 그 어떤 모임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나는 엄마가 장사를 하기 때문에 그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솔직히 말하자면 크게 관심이 없었다. 내가 졸업할 때, 엄마는 내가 다닌 중학교에 장학금을 냈다. 생각해보면 당시 우리 형편에 어처구니없이 큰 돈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때 왜 엄마가 장학금을 낸 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그 이유 또한 엄마의 우울증 투병 사실과 함께 알게 됐다. 엄마가 자신이 딸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느낀 그 1년을 내내 미안해했다는 사실을.


<레이디 버드>에는 나의 경험과 매우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언제나 다정한 아빠는 직업을 잃었고, 가족의 형편도 어려워져가지만 레이디 버드(시얼샤 로넌)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사실은 알 생각도 그다지 없으며, 엄마의 잔소리가 짙은 그늘을 드리운 이 “영혼을 죽이는 도시”를 떠나고 싶을 뿐이다. 레이디 버드는 약병을 본 뒤에야 아빠가 몇 년이나 우울증과 싸우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레이디 버드가 자기 자신이 되는 데, 그걸 위한 선택을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그는 이미 스스로가 원하는 자신이 되기 위해, 부모가 준 이름이 아니라 자신이 지은 이름 ‘레이디 버드’로 불리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레이디 버드는 자신도 상황도 연민하지 않고, 미치고 이상한 것처럼 보여도 세상에 기꺼이 부딪히며 마음껏 울고 웃고 소리친다. 엄마의 강권에 가까운 권유도, 아빠의 우울증도, 집안의 가난도 그가 자기 자신이 되는 걸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완전히 괜찮은 것은 아니다. 외동딸로서 부모를 떠나는 일은 당연히 고통스럽고, 아마도 앞으로 얼마 동안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부모의 부담이 더해질 것을 안다. 그래도 떠나며, 레이디 버드는 말한다.


엄마, 미안해. 내가 엄마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해서.

엄마, 미안해. 내가 엄마가 바라는 최고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서.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내 유년시절과도, 심지어 지금의 나와도 떼어놓을 수가 없다. 레이디 버드가 엄마에게 말하고, 사랑하고, 또 상처입히는 방식이, 끝내 하는 선택들이 도저히 다른 사람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는 건 알아. 하지만 나를 좋아하기는 해? 내가 나중에 성공해서 엄마가 나에게 쓴 모든 돈을 갚으면 돼? 그러면 되는 거지?”



영화가 끝난 후, <레이디 버드>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면서 나는 걷기 시작했다. 5주짜리 수업 하나를 등록하고 마음과 지갑이 다 가난해진 참이었다. 걷는 건 언제나 최고야. 돈을 절약할 수 있고 운동이 되니까. 8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는데도 아직 밝았다. 큰 빌딩 사이로 해가 지고 있었다. 그 방향으로 걸었다. 동시에 나는 20년 전, 새크라멘토만큼 햇살이 눈 부시지도, 느긋하게 평화롭지도 않았던, 오랜 가난의 흔적을 이후 20년간 채 지우지 못할 동네를 함께 걸었다.


딸과 아들이 등교한 뒤 엄마는 다시 드러눕는다. 뭉텅이로 시간이 사라지고, 늦은 오후, 아빠는 억지로 엄마를 데리고 나와 1.5톤 트럭의 조수석에 태운다. 별다른 대화 없이, 트럭은 익숙하게 옛 산성 쪽 방향으로 향한다. 근래 오른쪽 귀가 잘 들리지 않기 시작한 아빠는, 별일이 아니리라 생각한다. 나중에 한 쪽 귀로는 아예 듣지 못하게 되리란 것을 모르는 채로. 어차피 아내는 말하지 않으므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릴 일도 없다. 긴 시간 동안 차창에 걸쳐두어 이미 오래전에 검게 타버린 팔 위로 다시 빛이 쏟아지는 동안에도, 사실 그 이후로도 계속, 무엇이 아내의 삶을 구할지, 그는 모른다. 그는 그저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운전을 할 뿐이다.


아직 쉰이 되지 않은 엄마는 남편의 왼쪽 팔 위로도, 창밖으로 내민 자신의 얼굴 위로도 떨어지는 지는 햇살을 바라본다. 몇 년 뒤, 딸이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마지막 연수를 받다가 그 꼬불거리는 산길을 넘으리라는 것을, 무사히 넘고 돌아오는 마지막 길목에서 차선을 바꾸다 도로변 화단을 넘는 사고를 내리라는 것을 모르는 채로. 그 사고의 흔적을 그 어떤 공무원도 치우지 않아 몇 년이고 거기를 지날 때마다 딸이 저 사고를 내가 냈다고 말하고, 그때마다 심장이 떨어지리라는 것을 모르는 채로, 햇살 속에서도 죽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엄마는 살아낸다. 엄마의 신이, 기도가, 못돼먹은 딸이, 자신 말고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엄마를 살려낸다. 이후로도 삶은 순탄치 않게 흘러가고, 파산과, 사고와, 다툼이 기다리고 있지만 엄마는 다시 사는 생이므로 더는 아쉬울 게 없다.


그리고 십 오년 뒤, 겨우 빚을 지지 않을 만큼의 돈만을 벌면서 기약 없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무언가를 기다리면서 살아가던 서른의 나는, 상담사 앞에서 말한다. ‘그러니까 저는, 엄마를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데, 엄마보다 저를 더 사랑해요.’ 백만 원 남짓의 돈을 들고, 지구 반대편으로 향하기에 앞서서 왜 이런 말들을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엄마를 슬프게 한다고 해도 제가 되는 수밖에 없어요.


떠나기 전에, 당연히 떠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던 엄마는 말했다.


“너는 내 인생을 구했어. 난 그거면 됐어.”


깊은 우울이 찰랑이는 길고 끝나지 않는 터널을 지날 때, 내가 사 온 카네이션 꽃바구니를 보고 엄마는 살기로 했다고 말했다. 아마도 자식이라면 누구나 주는 그런 그냥 카네이션이었을 텐데, 아마 나는 열 네살 때도 열 다섯살 때도 어쩌면 국민학교에 다닐 때도 어버이날에는 엄마에게 카네이션을 줬을 텐데, 조금도 특별하지 않았을 그 카네이션에서 엄마는 터널의 끝을 보았다. 그거면 됐고,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지 않았으니, 원하는 곳으로 가서 원하는 너로 살아. 내가 슬픈 것은 어쩔 수 없지.



나는 여전히 이런 이야기를 하고 또 쓰는 것이 어쩐지 반칙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 모두의 약한 어떤 고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으로서도 너무 쉬운 길을 택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레타 거윅은 그 어떤 신파도 연민도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여야만 하는 이야기로 다시 만들어낸다. 그래서 알게 됐다. 어떤 이야기는 그 이야기의 주인이 기록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만 그 이야기가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레타 거윅의 이야기가 제시카 차스테인이 겪은 삶의 평행우주이며, 실은 나와 또 내 친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은 놀랍지 않은가. 이럴 때면 나는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의 한 문장을 떠올린다.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방식으로 쓰게 될 거예요. 이야기는 걱정할 게 없어요. 그건 오로지 하나니까요.”


시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다 진 상태였다. 부은 눈으로 마트에서 포즈Pods 라는 이름의 초콜릿 과자를 샀다. 이 과자를 한국에서 추천해준 친구에게 영화에 대해 말했다. 말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나서 물건을 보는 척 선반 가까이로 다가가 코를 훌쩍였다. 한숨을 한 번 내쉬어 호흡을 정리하고 눈 앞에 있는 물건을 바라봤다. 콘돔이었다. 25% 할인 중인 듀렉스 울트라 씬은 다 팔리고 없었다.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꼭, <레이디 버드> 같았다.



 글은 수정되어 내리막에 익숙한 밀레니얼을 위한 용기 고취 에세이 <우리가 서로에게 미래가  테니까> 실렸습니다.


너는 내 인생을 구했어. 나는 그거면 됐어.


이 말이 언제나 나를 버티게 하고 때로 내 목을 조른다.


너는 모르지. 너의 그 카네이션이, 나를 구했다는 사실을.


세상 어디에 있어도 이 목소리가 내게 들려올 때 결국 나의 대답은, 엄마와 아빠가 지어준 좋은 이름 크리스틴으로 살기로 한 레이디 버드의 마지막 대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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