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이나 Mar 26. 2020

제가 사랑하는 건 어쩔 수 없이


<소년소녀, 고양이를 부탁해!>

박사, 안난초, 윤정미, 이랑, 이원영, 황효진 지음 / 우리학교



나는 “털 있는 짐승과 인간은 같이 살면 안 되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알고 있다. 정확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같이 사는 사람이다. 사실 나는 그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인간도 털이 있잖아, 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맥락을 섞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 참아왔다. 참아왔는데 이 멍청한 대꾸를 문장으로 남기고 마는 실수를 지금 저지르고 있지만.


종종 그 말을 내게 하는 사람, 황효진이 <소년소녀, 고양이를 부탁해!>에 쓴 글 ‘그러니까 가족입니다’는 털 있는 짐승과 인간은 같이 살면 안 되는 것 같지만 같이 살고 있는 이유에 대한 길고 따뜻한 대답이다. 이 글에는 고양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들이 삶에 어떤 위안과 행복을 주는지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다. 고양이 화장실의 위치를 두고 남편과 말싸움을 하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이 글은, 예상되듯이 어딜 봐도 고양이에 대한 찬양도 고양이와 함께하는 삶에 대한 찬양도 아니다. 그보다는 고양이와(실은 인간과도) 함께하는 삶을 선택한 사람의 책임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황효진이 며칠 동안 쉬지 않고 회사의 일, 마감, 다른 프로젝트까지 해나가다가 거의 잠도 자지 않고 남쪽 먼 도시까지 갔던 날을 기억한다. 그날 그가 해야 했던 일은 고양이 두 마리를 서울까지 데리고 올라오는 일이었다. 짐은 포장이사를 통해 올려 보낼 수 있지만, 고양이를 그렇게 보낼 수는 없으므로 그는 거의 핏기가 없는 채로 집을 떠났고, 타고난 체력(매우 부러운 부분이다)으로 극한의 스케줄을 버티고 보통이와 보리를 데리고 올라와 새 집으로 짐을 옮겼다. 하지만 황효진은 책에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한 문장도 묘사하지 않고, 그다음 날에 대해 이렇게 쓴다.


처음 고양이들과 이사를 했을 때, 낯선 공간에 적응하지 못해 일주일 정도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 방을 뱅뱅 돌며 울던 보통이와 보리의 모습을 저는 절대 잊지 못합니다. 잠을 푹 자지 못하는 것은 저에게도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어떠한 예고도 없이 삶의 공간을 바꾸게 된 고양이들은 당시 얼마나 당황하고 무서웠을까요. 각자 다른 존재 넷이 살아가는 데 끊임없는 조율과 노동과 에너지 소모와 갈등이 필요하다면, 충분히 이해하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함께 더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은 자신들의 의견을 주장하기 어려운 고양이가 아니라 온전히 인간의 몫일 것입니다.


나는 고양이에 대해서도, 털 달린 짐승과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도 거의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막연하지만 확실하게, 나는 그런 공존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나는 종종 이러한 태도가 어느 정도는 사람(털이 있다니까)과 가족에 대해서도 적용된다고 생각하곤 한다. 이것은 <결혼이야기>를 본 뒤로 아담 드라이버 버전의 ‘Being Alive’를 백번 정도 들으면서 내가 줄곧 생각하고 있는 주제이다. 고양이든 사람이든 누군가 내 잠자리를 어지럽히는 상황에 처하고 싶지 않다는 것. 그러니까 인용한 문장 속에서 ‘끊임없는 조율과 노동과 에너지 소모와 갈등’이 생겨날 상황을 애초에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 하지만 아담 드라이버가 노래한다. 그건 그냥 혼자인 거야. 살아있는 게 아니야. 살아있는 건, 다른 사람이 내 의자에 앉고 잠자리를 어지럽히고 깊이 상처 주고 그런데도 나를 알아주고 지옥에도 보냈다가 삶을 견디게 해 주었다가 언제나 거기 있어주는 그런 거야.


이 글에 따르면, 산다는 것은 보리가 언제 벽지를 긁을지 노심초사하는 것. 샤워를 하고 나오면 보통이가 화장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그랬던 보통이가 자기 화장실 모래를 마구 튀겨 바닥을 엉망으로 만들고, 보리는 냉장고 위에 올라가는 것. 하지만, “제가 사랑하는 건 어쩔 수 없이, 이런 고양이이고 이런 보통이와 보리예요.” 그게 살아있다는 거고, 그게 함께 산다는 거다. ’그러니까 (이게 바로 내가 선택한) 가족입니다.’ 사람과, 고양이와,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좋은 점을 거의 나열하지 않고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리고 그 어려움을 발견하게 하는 일은. 발견하고서, 조금 주저하면서도 어쩌면 나 역시도 그 어쩔 수 없음을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건 어렵지만 어쩌면 해볼 만한 일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일은. 나는 계속 ‘Being Alive’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이 글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해서도 생각할 것이다. 이 어쩔 수 없음 뒤에는 이런 문장이 이어진다.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풀어야 할 수많은 과제들이 있겠지만, 그리고 두 고양이도 저와 남편도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 과제들의 난이도는 점점 더 높아지겠지만, 사랑하는 존재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라면 어려움을 피하지 않을 준비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나는 ‘사랑하는 존재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라면 어려움을 피하지 않을 준비’를 책임을 가지고 해내는 사람을, 그리고 인간의 어려움을 말하기에 앞서 고양이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기록하는 사람을 알고 있다. 그 사람은 아주 피곤하고 지친 어느 밤,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고양이를 안고 배를 만지면서 가만히 누워있고 싶어요.” 나는 그게 ‘제가 사랑하는 건 어쩔 수 없이’라는 뜻인 것도 이제 안다.

작가의 이전글 어쩌다 하남의 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