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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 Jul 11. 2023

“그럼에도 삼십칠 년을 더 살아 할머니로 죽고,”


상담실에는 두 개의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하나는 작년에 연장의 연장을 했는데도 얼리 버드 티켓을 쓰지 않고 결국 환불해서 못 간 요시고 전시의 포스터, 또 하나는 소설책의 표지 그림. 역시 작년 가을에 출간된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의 표지인데, 그 표지 그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책을 샀지만 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띠지는 버리고 거추장스러운 북커버 형식의 표지는 벗기고 책을 읽는 버릇이 있어서 만약 책을 사자마자 읽었다면 표지는 책들 틈새에 애매하게 접혀있는 상태여야 했다. 그러다가 책을 다 읽으면 책더미들 사이에서 커버를 찾아 다시 끼우고 책장에 입성시킨다. 책상과 책상 옆 의자, 책장 위, 침대 옆 등에 누워있는 책들은 모두 읽지 않았거나 읽다 만 책들로, 우리 집에 와 본다면 내가 얼마나 많은 책을 동시에 읽고 또 읽다 말았는지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이제는 구간이 되어가는 김연수의 신간 단편소설집은 책더미 맨 위에, 그러니까 ‘빨리 읽을 책’ 다짐 자리에 오래 머물렀던 것이다. 오며 가며 책의 표지를 너무 자주 본 탓에, 표지는 집에 걸어둔 그림처럼 익숙했다. 상담실에는 그 그림이 걸려있었다. 색색의 산과 검은 밤하늘, 달. 말을 하다가 막히면 가끔 미간을 만지거나 코끝을 긁으며 그림을 보았다. 때로는 수영장 위를 둥둥 떠다니는 사람들도 보았지만, 주로 표지 그림에 눈을 맞추었다. 매번 같은 생각을 하면서. 아, 저 책 아직 안 읽었는데.


예술인복지재단의 지원사업인 예술인 상담은 총 12회기까지 지원이 된다. 상담을 신청한 이유는 일 때문이었다. 그 무엇도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현재의 지지부진한 상황, 일하는 인간으로서 쓸모와 구실을 다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고민, 경제적인 불안감 뭐 이런 이야기들을 했던 것 같다. 1~2회기까지는 그랬다. 그렇게 2월이 왔다. 봄이 되었다. 이후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서너 번의 상담이 이어지자 느낌이 왔다. 이제 상담을 그만해도 되겠다고 하겠구나. 고민이라고 해야 할까, 걱정이라고 해야 할까. 상담‘거리’라는 게 내게 없음을 깨닫고 말을 멈추었을 때, 상담 선생님이 말했다. “이나 님이 생각하실 때 좀 더 나눠 볼 새로운 이야기가 없다면, 상담을 조기 종결해도 될 것 같아요.” 처음 왔을 때가 일시적인 스트레스 상태였고, 스스로 건강하게 잘 지낼 수 있는 힘이 나에게 있다고 했다. 그런가? 생각하며 나는 또 한 번 그림을 보았다. 저 책을 읽어야겠어.


상담 선생님이 말한 일시적인 스트레스 시기는 지난겨울이다. 정확하게는 작년 여름부터 지난겨울, 올해 초까지. 병원에서 불안약을 추가해 주고, 가만히 있는데 심박이 120까지 뛰던 시기. “스스로를 챙기며 잘 지내고 계신” 시기는 지난 4월부터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2월 한 달 동안 일을 못한 그 이후. 친구들을 자주 만났고, 만나야 했던 봄. 봄을 지나며 나는 종종 이런 말을 했다. 이제 내가 하고 싶고, 해야 하는 게 뭔지 알아. 웃고, 웃게 하는 거야.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와는 상관없이. 내가 장례식장에 갈 때마다 하는 얘기 있잖아. 김혜자 선생님이 남편상을 당하고 살아갈 의지를 모조리 빼앗긴 채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앞에서 절을 하는 남자의 발가락 양말이 너무 웃겨서 웃었다고. 웃으면서 징그럽게 살아있음을 느꼈다고. 내가 이 이야기를 할 때면 도대체 왜 예시가 언제나 1940~50년대 생 연예인이냐고 타박을 받지만 어찌 됐건. 하고 싶은 말은 내가 발가락 양말 역할이라는 거야. 조금 꼬랑내가 느껴져서 저어 되긴 하지만, 일단은 그래. 평생 친구들이나 웃기면서 살고 싶네요. 그게 제가 가장 바라는 일입니다.


그렇게 상담이 종료되고도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펼치기까지는 시차가 있었다. 소설을 읽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세상에는 있으니까. 예를 들자면 9년 차 아이돌의 캐해 영상 몰아보기 같은 것. 6월부터는 운동을 자주 했다. 더 이상 달리기가 싫지 않다. 대신 폴댄스가 싫어졌지만, 선호라는 게 언제나 한쪽으로만 흐를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러다가 소설을 읽게 되었다는 얘기다. 마감이 목 끝까지 차오른 인간은 머리를 굴린다. 양심에 찔리지 않으면서 끝내 할 수 있는 딴 일이 뭐가 있을까. 좋아, 책을 읽겠어! 마침 며칠 전 표지 그림을 벗겨둔 김연수의 책이 눈앞에 있었다. 드디어 이 책을 읽게 되는군.


그렇게 두 번째 소설, ‘난주의 바다 앞에서’를 읽게 된다.


그에 앞서 첫 소설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은 소감은 이랬다. 작년에 이 책을 읽은 친구가 ‘우리가 김연수 소설 많이 읽을 때, 그때 느낌과 비슷해’라고 했는데, 역시 그렇다고.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읽을 때 생각이 많이 나는 소설이었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마지막 문단을 읽고, 또 읽고, 다시 읽었을 때. 그러다 외워버리고 말았던 그때. 그 소설을 같이 읽고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 중 누군가와는 만날 일조차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흘렀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 식으로 시차를 두고 대충 16년 전쯤을 기준점으로 이미 근과거가 된 미래를 기억하자면, 후에 큰 상처를 받기 위해 그 시절에 평범하게 서로를 아끼며 살아간 셈이다. 반면 다시 오늘을 미래로 기억하고 6년 전을 살 수 있었다면, 아마 덜 상처받을 수 있었을 텐데. 뭐 그런 생각들.


그리고 ‘난주의 바다 앞에서’를 읽는다. 다 읽고 책을 내려놓는다. 가방을 메고 남은 물을 텀블러에 채워 넣고 카페 밖으로 나선다. 집으로 돌아와 달리기를 한다. 씻고 테니스를 보다가 잔다. 깨어나서 병원에 간다. 달리기가 폴댄스가 되거나 자전거 타기가 되거나 하는 일주일 동안 각기 다른 세 개의 병원을 들르고, 문득 소설의 마지막 세 페이지를 다시 읽는다. 신라면과 삼양라면과 진라면으로 한 번씩 올리오올리오를 만들어보고 라면의 종류보다는 면수를 남겨두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다가 소설 속에서 ‘세컨드 윈드’를 설명한 문단을 다시 읽는다. ‘난주의 바다 앞에서’라는 제목은 별로 입에 붙지 않는다. 내가 종종 한 곡을 몇 십 번씩 반복해서 듣는 이유는 시절의 배경 음악을 지정해 주기 위해서는 아닐까 생각한다. 지난봄은 루시의 ‘히어로’였다. 장마라는 이름으로 더 이상 부르지 않을 거라는 소한과 오늘, 초복 즈음은 몬스타엑스의 ‘By My Side’를 듣는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하는 메시지를 쓰기 시작한다.


“내가 단편 소설을 한 편 읽었는데, 거기 ‘정난주’라는 이름의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도 나오는 정난주 이야기의 한 장면에서, 그러니까 그 ‘바다 앞에서’, 소설의 화자가 대학 시절의 친구 손유미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소설은 끝난다. 안내판과 포털 사이트에 적힌 내용과 같지만 한 가지 부분이 다른 이야기다. 마지막 문단은 “도저히 넘어가지 못할 푸른 벽에 가로막혀 그 바다로 몸을 던진 정난주는”으로 시작하지만, 역사라는 스포일러에 의하면 그는 산다. “그럼에도 삼십칠 년을 더 살아 할머니로 죽”는다.


이 이야기를 하필이면 지금 읽으려고 지난 반년 동안 표지만 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반년 전에 읽었다면 이 소설에 대해 굳이 글을 쓰거나 다시 읽지는 않았으리라는 것만은 안다. 소설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반년 전의 나는 2023년 봄을 지나 온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023년 봄, 상담 선생님이 표현하기를 이나 님이 일시적 스트레스를 견디고 이전의 상태를 되찾은 봄, 나를 둘러싼 상황이 계속 나빠지는 중에도 매일매일 심박수가 조금씩 안정되어가던 봄, 눈을 감으면 금세 잠이 들고 가계부는 들여다보지 않았던 그 봄을 지나 도착한 여름.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이 뭔지 안다. 그건 바로 너와 내가 “그럼에도 삼십칠 년을 더 살아 할머니로 죽”는 것. 할머니로 죽기 전까지 친구들이나 웃기면서 살아가는 것. 그래요. 그게 제가 가장 바라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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