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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 Apr 12. 2022

한 발걸음, 한 팔걸음, 한 바퀴만큼씩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 연대하며

넷플릭스, <크립 캠프: 장애는 없다 Crip Camp: A Disability Revolution>


“접근성 있는 화장실로 감사함을 느껴야 한다면
내가 우리 사회에서 평등해질 날이 올까요?”

- 장애 인권운동가, 주디스 휴먼


서른이 되던 해,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에 갔다. 친구가 이미 정착해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택한 도시 브리즈번의 첫인상은, 날씨 하나는 정말 좋다는 것이었다. 365일 중 300일이 맑음이라 별명도 선 브리즈번(Sun Brisbane)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맑은 날씨를 평화로이 만끽하고 있을 때, 누군가는 이를 이용해 돈을 벌기 마련이다. 이런 동네에서는 우산이 아닌 선글라스를 팔아야 한다. 나도 선글라스를 팔았다. 저렴한 중국산을 수입해 적당한 가격에 판매하는 선글라스 매장이 호주에서의 내 첫 직장이었다. 당시 브리즈번에만 아홉 개 쇼핑몰에 입점해 있던 선글라스 매장은 사람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중심부에 있었다. 일주일에 4일 혹은 5일, 하루에 짧게는 네 시간에서 길게는 여덟 시간 동안 두 개를 사면 한 개가 반값이 되는 선글라스를 팔면서 호주 생활에 적응해갔다.


출산 후 단 보름 만에 태어난 지 15일 된 아기를 유아차에 눕혀서 나온 한 젊은 엄마는 곧 휴가를 간다고 했다. 아기를 낳은 날 저녁에 오렌지 주스를 먹고 샤워를 했다던 그는, 한국에서는 산모가 두꺼운 양말을 신고 하루 종일 누워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깔깔 웃고는 선글라스를 두 개나 사갔다. 오픈 시간마다 들러 한심하고 성차별적인 농담을 하는 노인이 있는 지점으로 출근해야 할 때는 한숨이 나오곤 했다. 한 십 대 무리가 환불을 하러 찾아와 퍼붓는 인종 차별도 경험했고, 약에 취한 커플이 찾아와 한 명이 정신을 빼놓는 사이 다른 한 명이 선글라스를 훔쳐가는 일도 겪었다. 겨우 서너 달 남짓의 시간이었지만, 그 정도로 다양한 세대, 인종의 사람들을 만난 건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은 침대를 타고 온 손님이다. 침대를 탔다는 표현이 적절한지 잘 모르겠다. 침대에 실려 왔다고 썼다가, 잠을 자는 자리가 아닌 이동의 도구로 침대가 쓰였기 때문에 ‘타다’라는 동사를 쓰려고 한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는 장애를 가진 것 같았고,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였다. 한참 멀리서부터 시선을 끌던 침대가 우리 매장 앞에 멈추어 서자, 나는 당황했다. 그와 함께 온 사람이 말했다. “이 친구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선글라스를 골라주고 싶어요. 어떤 테가 잘 어울릴까요?” 나는 최대한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대답했다. 그때 쓴 영어 문장을 지금도 기억한다. “제가 직접 여쭤봐도 될까요? (May I ask to him myself?)” 손님은 지나치게 크지 않은, 날렵한 테를 원했다. 코의 높이와 얼굴의 가로 폭에 따라 어울리는 테의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나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본 뒤 신중하게 선글라스를 골랐다. 우리 매장의 가장 큰 장점은 저렴하다는 것, 그리고 종류가 많다는 것이었다. 내가 골라준 선글라스를 가족이 씌워주는 것까지 보고, 매장에서 가장 큰 거울을 그의 얼굴과 마주 볼 수 있게 위쪽에서 들었다. 다행히 그는 내가 골라준 선글라스를 마음에 들어 했다. 침대를 타고, 선글라스를 그대로 쓴 그가 떠났다. 나는 생각했다. 집에만 있을 텐데 왜 선글라스를 샀을까? 그리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집에만 있지 않으니까 쇼핑몰에 온 게 아닌가. 그는 쇼핑몰에 온 것처럼, 또 침대를 타든 다른 탈 것과 함께든,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로든 갈 것이다. 선글라스가 필요한 것은 당연했다.


그때부터 침대를 타고도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세계가 내게도 열렸다. 나는 휠체어를 탄 사람이 자유롭게 출입하고, 침대까지 들어올 수 있는 구조의 건물에서 일하고 있었다. 우리 매장의 장점은 하나 더 있었다. 문턱이 없는 쇼핑몰의 기둥 없는 자리에 위치해서 누구나 올 수 있다는 것. 유아차도, 휠체어도, 침대도 출입이 가능한 매장에서 선글라스를 판 경험은 호주라는 나라와 도시에 대한 인상까지 바꾸었다. 여행으로 접하며 눈으로 보는 도시의 인상과 일하고 생활하며 직접 몸으로 겪는 도시의 수준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도 그때 배웠다.


이후 쇼핑몰에서, 길가에서, 시장에서, 강가에서, 레스토랑에서, 여성의 날 시위 현장에서, 어디에서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마주쳤다. 주말 시장에서 목과 머리를 고정하는 기구를 착용한 사람과 스쳐 지나간 뒤, 같이 있던 친구가 내게 물었다. “호주에는 한국보다 장애인이 많은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나는 잠깐 생각해보고 장애인이 많은 게 아니라 장애인이 밖에 나오고 활동을 하니까 많이 볼 수 있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럼 한국의 장애인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요?” 이어진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집? 시설? 어떤 답이든 질문을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뿐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장애인들은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크립 캠프: 장애는 없다>는 이 질문에 답을 알려주고, 거기서부터 시작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장애인을 시설에 머무르게 하는 방식의 분리 정책을 포함해서, 장애인이 드러날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하는 사회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장애인이 문밖으로 나와서 이동할 수 있는 공간, 방문하고,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지지 않으면, 이들이 머물 수 있는 협소한 공간이 시설화된다. 집일 수도 있고, 시설일 수도 있고, 또 다른 공간일 수도 있지만, 그곳이 어디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공존할 수 없다면 장애인 분리 시설이나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과거의 미국 역시 장애가 있는 사람을 차별하고 분리하는 사회였다. 지금의 미국 사회가 조금이라도 이전과는 달라졌다면 누군가 차별에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1973년, 정부의 분리 평등 정책(Separate but equal)을 비판하고 장애인 차별을 금지하는 재활법 504조 제정을 요구하며 장애 활동가 주디스 휴먼은 이렇게 말한다. “분리를 멈추십시오. 분리에 대한 논의는 더는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크립 캠프: 장애는 없다>는 이 위대한 선언이 들려올 장애인 인권 운동 투쟁이 펼쳐지던 시기로 떠나기에 앞서, 한 캠프의 풍경을 보여주며 여정을 시작한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열렸던 청소년 캠프 제네드는 십 대 장애인들에게 낙원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장애로 특징지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고유한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캠프에서 이들은 “나에게 맞게 지어진 세계”를 경험한다. 캠프 제네드에서는 나에게 맞는 속도로 움직이면 상대에게 가닿을 수 있다. 이들은 가진 모든 언어로 서로의 언어를 통역하고, 기다리면서 소통한다. 모든 결정은 스스로 내리고, 결정을 내리기까지 치열하게 토론한다. 가족이나 친지가 아닌 타인에게도 기꺼이 ‘몸을 맡긴’ 경험, 내가 맞추지 않고 나에게 맞춰진 세계에서 생활한 경험은 이들을 바꾸어놓는다.


마음껏 웃고 떠들고 움직이고 듣고 말하고 이해하면서 지냈던 캠프를 떠나면서, 한 사람은 이런 말을 남긴다. 마음 편히 돌아다닐 수 없는,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던 일은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일”과 같았다고 말이다. 이 말은 캠프 제네드가 우리가 살아야 하는 미래라는 의미와 같다. 주디스 휴먼을 비롯해 캠프를 경험한 청소년 중 많은 수가 어른이 되어 활동가의 길을 택하고, 장애 인권, 보편적 민권을 위해 싸운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미래를 경험한 사람은 결코 과거에 살 수 없다. 이들이 마땅히 가져야 했을 미래를 미리 경험하고 요구한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재활법 투쟁에 참여한 활동가들은 캠프에서와 똑같이 행동한다. 수어 통역사 없이는 회의를 시작하지 않는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한 사람에게 한 번씩 의견을 물으면서, 정직하게 하루하루 싸움을 이어간다. 한 발걸음, 한 팔걸음, 한 바퀴만큼씩 나아가 승리를 얻어낸다. 모두 함께.


재활법 504조 제정을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이들이 점거 시위를 벌일 때 등장한다. 흑인 인권을 위해 싸웠던 단체인 블랙팬서는 이들에게 음식을 제공한다. 노조원들, 외부의 다른 인권 활동가들, 성 소수자 단체도 이들의 투쟁에 연대한다. “세상을 더 나아지게 만들려는 거잖아요. 우리 목적도 그거예요.” 지금 살아가는 세상이 나에게 맞지 않다는 걸 아는 사람들, 차별받고 소외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도울 게 있는지를 묻고, 달려와서 머리를 감겨준다. 밥을 해준다. 살아서 존재하고, 일상을 지키며 싸울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런 사람들만이 서로를 통해 세상을 배우고, “자신을 위한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로부터 나아지고, 나아간다.


‘크립 캠프’의 ‘크립(Crip)’은 미국의 속어로 ‘장애가 있는, 절름거리는, 불구의’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직관적이지 않아서인지 한국어로 붙은 부제 ‘장애는 없다’의 의미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크립 캠프에 장애는 없었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장애는 인식일 뿐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한국 사회에 장애인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하루 종일 서울을 돌아다녀도 신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장애인 시설이 격리와 수용의 역할을 담당하는 사회에서는 일상적으로 장애인을 볼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은 쉽게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런 사회를 사는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많은 시민이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를 의아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동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치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선글라스를 쓸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처럼. 발목 인대 부상으로 목발을 쓰게 되고 나서야 엘리베이터로만 이동이 가능한 사람은 우리 건물에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처럼. 침대를 타고도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세계는 어느새 닫혔다.


어떻게 다시 열릴 수 있을까? 장애인 이동권 시위가 왜 필요한지, 왜 이들이 출근 시간에 맞춰서 시위를 하는지 생각해보는 것에서부터다. (출근길 시위를 하는 이유는) 시민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편함이 만들어내는 질문을 통해서만 (장애인의 존재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그들에게 맞추어 설계된 세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불편하게, 느리게, 가까스로 움직여야 하는 장애인의 존재는 오직 비장애인이 불편함을 느끼는 그 시간에만 인식된다. 그 시간에 보이지 않던 이들을 볼 수 있었다면, 그들이 원하는 만큼 한 발걸음, 한 팔걸음, 한 바퀴 이동할 수  있었다면, 누군가는 지각했겠지만, 그 시간만큼은 시계가 거꾸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일보 ‘김봉석 윤이나의 정기구독’에 연재했던 원고를 책에 싣기 위해 수정한 글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최종적으로는 책 <해피 엔딩 이후 우리는 산다>에 실리지는 않았는데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공개합니다.

 

4월 13일 오후 3시, JTBC에서 박경석 전장연 대표와 국민의힘 이준석 당대표의 토론이 중계됩니다. 전장연과 연대해주시고, 힘이 되어주세요.

국민은행 009901-04-017158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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