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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태웅 Aug 20. 2019

17화: 방구석 마케터입니다만

두 달간 재택근무를 하며 생각한 것


날이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비가 쏟아졌어도 좋은 날로 기억할만한 순간이었지만) 정말로 날씨가 좋았다. 요즘처럼 푹푹 찌는 더위가 아니라 적당히 몸이 나른해지는 더위가 느껴졌다. 거의 매일매일 걷던 길을 따라 새삼스러운 감정을 느끼며 발걸음을 옮겼다.


6월의 마지막 금요일이자 마지막 출근날이었다.








1.

이곳에 모든 내막을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누구에게나 있는 '사정'으로 인해 새로운 길을 택하게 됐다. 처음 의도와는 다른 부분이 많지만, 나에게 있어서 '재택근무'라는 새로운 길은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6월이 시작될 무렵부터 재택근무에 대해 차근차근 준비했다. 퇴사는 아니지만, 어찌 됐든 사무실에서 일했던 만큼 일을 장악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했기에 인수인계를 진행했다. 어차피 회사에서 하던 일의 연장선에 놓인 재택근무였기 때문에, 내가 집에서 실시간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위주로 업무를 넘겼다.


사무실에서는 듀얼 모니터를 사용했다. 이런저런 레퍼런스를 찾아볼 일도 많고, 보고서를 한 번 쓰려고 하면 GA와 같은 분석 툴을 수시로 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4년을 일했더니 이제 모니터 하나로는 일하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 그래서 집 내 방에도 모니터를 하나 장만했다. 나름 사무실에서 일하던 환경과 비슷하게 구현하기 위함이었다.


일할 준비를 마치고, 모니터 성능 시험 삼아 영화를 봤다는 후문이...


이외에도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길 것 같아서 과감하게 PT 등록했다. 항상 야근 때문에 PT쌤 얼굴 보는 게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웠던 나날을 생각해보니, 이번에는 그때보다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하나 둘, 새로운 환경을 한 준비를 하다 보니 금방 여름이 시작되었다.



2.

마지막 출근일을 기점으로 어느덧 약 두 달의 시간이 흘렀다. 언제 회사를 다녔냐는 듯이 지금의 이 생활에 잘 적응 중이다.


두 달 동안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집에서 일하는 게 집중이 되냐는 물음이었다. 그동안의 경험을 기반으로 대답을 해보자면, 그래, 맞다. 집중이 잘 안 된다. 진짜 제발 안 된다. 생각해보면 집은 애초에 일하는 곳과는 거리가 멀다. 고개를 뒤로 45도만 돌려도 아늑 아늑한 침대가 기다리고 있고, 주위에는 영화, 예능, 책과 같은 재미난 콘텐츠가 너무 많다.


무엇보다 힘든 건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재택 야근'을 할 때다. 아마, '도대체 집에서 뭐하는 짓이냐'라고 일갈할 분이 많을 것 같다. 슬프게도 사무실에서는 떠났지만, 일은 그대로 나를 따라왔다. 생각해보면 에이전시에서 하던 일의 강도가 높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더군다나 앞서 이야기한 대로 집중력이 예전만 못하니 업무 진행이 늘어지는 것 또한 재택 야근의 원인이다.


밤이 찾아왔습니다. (재택) 야그너는 고개를 들어주세요


재택 야근이 힘든 이유는 '가족들이 쉬는 순간에, 나는 같은 공간에서 야근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가족들이 밥 먹는 소리, TV 보는 소리, 대화하는 소리가 귀에 때려 박힌다. 그뿐만 아니라 주방에 가던 길에 자꾸 방에 들러서 한 번씩 구경하고 간다. 가족들은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본 적 없기 때문에 신기할 수 있다만, 그런 관심은 일하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냉장고로 가던 길 그냥 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아차차. 쓰다 보니, 재택 야근에 대한 분노로 인해 너무 안 좋은 이야기만 늘어놓은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런 분이 얼마나 되겠냐만, 혹시나 재택근무를 준비하던 분이 이 글을 보고 포기할까 봐 쓸데없는 노파심마저 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재택근무는 장점도 다는 점이다.


우선, 출근과 퇴근을 하지 않는 점에서 나의 시간을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다. 필자의 경험을 예로 들자면, 사무실까지 편도로 1시간 30분, 왕복 3시간에 걸친 긴 수행 길을 오고 갔어야 했다. 그런 반면에 재택근무를 하는 지금은 하루에 적어도 3시간은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쓸 수 있게 됐다. 피곤하면 잠을 더 자도 되고, 그 시간에 운동을 가도 된다.


또 다른 장점은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일할 수 있다는 점이다. 미팅이 있거나, 보고서를 쓰기 위해 듀얼 모니터가 필요한 때를 제외하고는, 노트북과 와이파이만 있다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다.


- 콘텐츠 기획자가 재택도 하고 노트북 가지고 스벅에서도 하고 그러는 거지 뭐 ㅎ


부장님이 해주신 명언처럼, 콘텐츠를 기획하는 마케터는 스타벅스에서 충분히 일할 수 있다. 이메일과 메신저를 통해 클라이언트, 개발자, 디자이너, 외주사 등과 소통할 수 있고, 노트북에 있는 툴을 활용하여 콘텐츠 기획, 디자인 기획, 원고 작성, 콘텐츠 검토, 코딩파일 수정, 광고 관리, 예산 관리 등 모든 업무를 진행할 수 있다.   


오히려 이러한 환경에서 일하는 것이 집에서 일할 때보다 훨씬 집중이 잘 된다. 동네의 다양한 카페를 찾아다니는 재미도 있다. 아마도, 날이 선선해지는 가을이 오면, 동네에서 벗어나 조금 더 멀리 새로운 일터를 찾아 떠날 것 같다.



3.

이토록 장점과 단점이 명확한 재택근무는 이제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아직 겨우 두 달이지만, 그동안 재택근무를 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문명의 혜택으로 인해 일에 있어서 점점 자유로워지고 있다. '직장'에 얽매이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보니 '직장인'이 아닌, '직업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스스로 확실히 프로정신을 가지고 진행할 수 있는 일거리와 능력이 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직업인으로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지금은 말을 이렇게 해도 몇 달 뒤에 다시 직장인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마 그때가 되면 이전과는 다른 마음가짐을 갖고 내 일에 임할 것 같다.






나의 일터, 나의 방구석


에이전시에 입사를 하고, 제안 수주를 하며, 성장해왔던 순간을 기록해온 '에이전시 마케터입니다만' 매거진에 이제는 재택근무에 대해 글을 쓰게 되어 감회가 새롭다. 앞으로의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사무실에서 떠나 더욱 주도적으로 일에 임하게 된 이 나날들이 분명 좋은 성장의 기회가 될 거라 믿는다.


에이전시의 사무실에서는 떠났지만, 여전히 에이전시의 일을 하고 있으니 아직은 에이전시 마케터라고 할 수 있겠지? 나조차도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 같다. 방구석 마케터로서의 나날도 흥미진진할 거 같아 기대된다. (그저 재택 야근이 줄어들길 바랄 뿐이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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