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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태웅 Oct 23. 2019

18화: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재택이라는 이름의 자유, 근무라는 이름의 책임


"주말에 뭐하셨어요?"

"그냥 영화 모임 나가고, 데이트도 하고 그랬어요."


"오, 프리랜서라고 하셔서 평일, 주말 구분 없이 바쁘실 줄 알았는데 괜찮으신가 봐요!"
"아, 일하는 시간은 회사 다닐 때와 비슷해요. 일하는 장소만 조금 다르..."



그 순간, 그의 손이 어깨와 목 사이를 강하게 파고 들어왔고, 나는 이를 꽉 깨물며 대화가 종료됐다. 평일 오전 11시 30분, PT를 받는 재택근무러와 그런 나의 몸을 풀어주던 트레이너 선생님과의 대화였다. 재택근무를 시작한 지 4개월이 다 되어가고, 함께 작성하기 시작한 PT 확인표도 그만큼 사인을 채워갔다.


PT를 오전 11시 30분이라는 애매한 시간에 시작하는 이유는, 일반 직장의 점심시간인 오후 12시~1시에 맞춰서 운동을 하기 위함이다. 프리랜서라고 하기에는 퍽 규칙적인 일상이고, 회사원이라고 하기에는 제멋대로인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1.

오전 8시, 알람을 들으며 잠에서 깬다. 6시에 일어나느라 어둠 속을 허우적대던 회사원 시절과는 달리 이제는 아침 햇볕이 알아서 울어대는 핸드폰을 찾아준다.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공복에 먹어야 하는 영양제를 챙겨 먹는 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또 까먹고 안 먹을 공산이 크다.


영양제가 흡수되었다고 나름 판단될 시간이 되면, 냉장고에 가득한 닭가슴살 음식을 꺼내 먹는다. 주로 소시지와 큐브를 먹는데 처음에는 영 먹을 맛 나지 않았던 것들이 요즘은 음미하면서 먹을만하다. 빠르게 적응해준 입맛 덕분에 살도 빼고, 피폐해졌던 몸도 점차 건강을 되찾고 있다. 배를 채운 후에는 노트북을 켜고 일할 준비를 한다.


"선임님, OOO 콘텐츠 확인 부탁드립니다." "촬영 일정 확인 부탁드립니다~"

"네 확인하겠습니다."


주로 하는 일은 회사를 다니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클라이언트와 전화, 메신저, 메일 등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팀원들과 콘텐츠를 기획하거나 검토한다. 가끔씩 직접 광고를 집행하며, 보고서를 작성한다. 클라이언트에게 무언가를 보낸 이후 피드백이 오기 전까지는 나름의 여유시간이 생기는 편이라 그 틈에 뉴스를 보거나 영상을 본다.  


오전에 진행해야 할 업무를 빠르게 정리한 이후, 오전 11시 30분이 되면 헬스장으로 향한다. 2~3일에 한 번씩 회사의 점심시간을 활용해서 다녀오려고 한다. 일의 특성상 업무 전화가 많이 오기 때문에 되도록 통상적인 업무 시간과 겹치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1시까지, 헬스장에서 보내는 1시간 30분이 내 몸에 온전히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다. 재택근무를 시작하면서 가장 보람 있게 보내는 시간.



2.

오후에는 종종 집 근처 카페에서 일을 한다. 집에서는 듀얼 모니터로 일할 수 있기 때문에 효율성이 높지만, 반대로 재미있고 편한 게 너무 많아서 효율성이 낮아진다. 어쩌다가 침대에 한 번 누울 때면 다시 일어나는 게 영 쉽지가 않다. 카페에는 최소한 침대는 없지 않은가.


카페의 장점은 적당한 소란스러움이 있다는 점이다. 공부할 때도 그렇고, 일할 때도 그렇고 너무 조용한 분위기에서는 집중이 잘 안 됐다. 적당한 소음과 더불어 노동요를 들을 때 비로소 업무에 제대로 집중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다. 게다가 워낙 커피를 좋아하기 때문에 더 좋을 수 밖에 없다.



요즘은 가을이라 날씨도 좋고, 새로운 환경에서 일해보고 싶은 마음에 조금 멀리 길을 떠나기도 한다. 일주일 중 하루 정도는 오후에 여유가 생기는데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소위 핫플레이스를 찾아다닌다. 가장 최근에는 연남동을 다녀왔다. 평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연트럴 파크에는 따뜻한 날씨를 즐기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커플도 참 많더라. 이 시간에, 이 좋은 날씨에 데이트를 즐기는 이들이 한 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한참을 걷다가 연남의 풍경이 보이는 카페 창가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켰다. 커피 한 모금, 사람 구경 한 번, 다시 커피 한 모금, 일은 미뤄둔 채 세상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자유롭게 주어진 나의 시간에 정신을 놓고 있노라면, 밀렸던 업무가 떠올라 깜짝 놀라며 스스로 다그치는 날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이게 다 너무 좋은 날씨 탓이야.



3.

오후 5시, 연남에서 업무를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 시간에 지하철에 타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면 새삼 회사를 다니지 않고 있음을 실감한다. 지난 4개월 동안 출근과 퇴근이 없었다. 졸린 눈 비비며 출근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지하철을 타지 않아도 됐고, 유난히 멀게 느껴지던 퇴근길도 더 이상 걷지 않는다. 늦은 오후에 연남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걸으며 다시금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무게감을 실감한다.


재택근무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 끈기 있고 통제력이 강하다고 자부해왔다. 4년간 지각을 하던 날이 손에 꼽을 정도였고, 평소 책임감 강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어왔기에 착각은 아녔을 것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이런 판단과 평판은 '회사'라는 조직 안에서 사내 규정에 따라 움직인다는 전제조건이 붙었을 때의 이야기라는 걸 얼마 전부터 깨닫기 시작했다. 


회사를 다닐 때도 수동적으로 일을 해오진 않았지만, 그래도 직장 상사가 있고 동료들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받으며 일에 더 몰두할 수 있었다. 반면에 지금은 혼자 원하는 곳에서 일을 한다. 물론,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와 개발자 분들은 있지만, 한 공간에 있고 없고의 차이는 분명하다. 공간 제약이 없고, 시간을 어느 정도 유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자유가 생겼지만, 매 순간 스스로 통제해야 한다는 큰 책임이 따라붙었다. 


 

다행히도, 4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는지 점차 무게감은 줄어가고 있다. 스스로 만드는 루틴이 일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은 4개월이다. 비록, 커리어 측면에서는 성장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일에 대한 통제력은 제법 늘지 않았을까. 


당장은 빛을 발하지 않아도 언젠가 제대로 활용할 날이 올 비법을 전수받는 마음으로 이 생활에 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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