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화_ 여행의 부작용

사소한 이유로 떠났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이야기

by 사람 여행자

여행의 부작용


마지막 날 밤, 저는 한식을 준비했습니다.

이번에는 불고기를 굽고, 신라면 세 봉지를 끓였어요.

요리라 하기엔 부끄러울 정도로 간편하죠?


설거지를 끝내고 거실에 들어온 순간

바트와 수가 깜짝 이별 파티를 열어줬습니다.

손가락 크기만 한 파이 위에 양초 하나를 꽂아둔 게 다였지만,

마음 한 구석이 따뜻했습니다.


"윤. 그동안 고생 정말 많았어. 또 와줄 거지?"

"그럼요. 나중에 영국 남단으로 도보 여행하려고 올 거예요. 그때 잠시 쉬러 와도 되죠?"


작별인사를 할 때는 착한 거짓말이 나옵니다.

언젠가 다시 돌아오겠다는 기약은 일종의 주문이죠.

슬퍼하지 않기 위해,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나기 위해 외웁니다.


현지 가족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만남과 이별의 연속이에요.

많은 정을 나눌수록 떠나는 날 더 힘들어집니다.

행복했던 순간이 한순간 최악으로 뒤바뀌니까요.


스위스와 이탈리아에서는 정말 이별하는 순간이 힘들었는데.

이번 영국은 여전히 슬프지만 그때만큼은 아닌 것 같아요.

그새 작별인사에 익숙해졌나 봅니다.

감정에 굳은살이 박였다고 할까요.


더 옛날에는 이별하고 나서 한동안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감성이 몰랑했습니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익숙한 곳에 있었는데, 눈 떠보니 다른 세상.

막상 떠나는 날에는 정신이 없어 슬픔에 둔감한 데, 차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수록 그때가 생각나요.

얼마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지 뒤늦게 깨닫죠.

그때 그 순간을 더 충실하게 보냈어야 했다는 후회도 생깁니다.

그런 경험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니, 이젠 슬픔을 느낄만하면 감정이 마비되네요.


여행의 부작용이랄까요. 이별에 냉정해졌습니다.



사소한 이유로 떠났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이야기


제가 왜 영국 남단을 선택했는지 기억나시나요?

영화 <어바웃타임> 남자 주인공의 고향이 바로 이쪽 지방입니다.


오로지 좋아하는 영화 때문에 이곳까지 찾아왔네요.

당나귀 농장을 선택한 것도, 혹독한 추위를 견뎌낸 것도, 모두 그 연장선이었죠.


생각해보면 여행의 목적과 장소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와 같이 자잘한 일에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군가는 감명 깊게 읽은 책 때문에 남미를 꿈꾸기도 하고, 페이스북 영상이나 어떤 사진을 보고 유럽행 항공권을 끊기도 하죠.


사소한 이유로 영국 남단을 선택한 것이 잘한 일일까요.

내심 영화 속 낭만 가득한 이야기가 펼쳐질 줄 알았는데, 현실은 시트콤이었네요.

비바람을 맞고, 추위에 떨고, 당나귀 똥오줌을 치웠습니다.


절벽 위에 서서 영화 속에 나오던 해안 절벽을 바라보니 지금까지 생긴 일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습니다.

남들은 예쁘게 차려입고 관광지를 떠도는데, 저는 작업복을 입고 마구간을 청소했다니요.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못해 자랑스러웠습니다.


영화 한 편을 따라 떠난 여행.

그 끝에 당나귀가 있을 거라고 어느 누가 상상했을까요.


예상치 못한 호스트를 만나 예고에 없던 시나리오가 펼쳐진다.

사람 만나는 여행, 워크어웨이의 또 다른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혹시 질문이나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인스타그램이나 이메일, 댓글로 남겨주세요.

낮은 자세로 항상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인스타그램: yoon_istraveling

이메일: yoonistraveling@gmail.com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