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혼모 내집마련기23
나는 독실한 신자는 아니다. 매일 새벽 기도를 거르지 않거나 성경 구절을 줄줄 외우는 열혈 신도는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신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때로는 아이처럼 떼를 쓰며 소망을 말하기도 한다. 그 존재는 나에게 거창한 교리가 아니라, 삶이 흔들릴 때마다 붙잡았던 가느다란 밧줄 같은 것이었다.
나의 종교적 뿌리는 사실 불교였다. 친가는 대대로 절에 다녔다. 그런 아빠가 어린 나의 손을 잡고 처음으로 교회당 문을 두드린 것은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간암에 걸린 할아버지를 고쳐달라고 기도하기 위해, 종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아빠와 나는 낯선 십자가 아래 자리를 잡았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신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 후, 엄마가 아프고 부모님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엄마의 치료를 핑계로 엄마와 함께 대도시로 나오게 되었다. 병원에 다니며 일도 해야했던 엄마는 나를 돌볼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외삼촌 가족이 사는 반지하로 이사했고 아직 어렸던 동생은 외갓댁으로 갔다. 그렇게 뿔뿔이 흩어진 가족, 불안한 환경 속에서 나를 이끈 건 반 친구의 손이었다. 찬양을 따라하고 목사님 말씀만 잘 들으면 간식도 주고 달란트도 받았다. 100원의 헌금이 달란트로 바뀌고, 달란트 잔칫날, 달란트는 떡볶이로 평소 갖고 싶었던 예쁜 학용품으로 변신했다.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던 나에게 맘껏 노래하고 간식도 주는 교회가 어린 나에게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그해 겨울, 12월 24일 밤. 크리스마스 예배를 보던 그날. 나는 진심을 담아 기도했다.
"우리 엄마, 아빠, 동생... 모두 함께 살게 해주세요."
그 기도는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이루어졌다. 초등학교 1학년, 신이 내 기도를 들었다는 강렬한 경험은 나를 스스로 교회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내 삶이 내내 종교라는 한 길로만 흐른 것은 아니었다. 나의 아빠는 결국 절에 모셔졌고, 아들의 아빠는 천주교 미사로 배웅했다. 한동안은 원불교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누군가는 기구하다 말할 그 복잡한 종교적 사연들 사이에 늘 상실이 있었다.
사람이 느끼는 스트레스 순위 중 부모의 사망이 3위, 배우자의 사망이 2위라고 한다. 어떤 지표에서는 배우자의 죽음을 1위로 꼽기도 한다. 그 거대한 상실의 파도가 덮칠 때마다 다시 교회로 돌아갔다. 아니, 누군가가 나를 그곳으로 끊임없이 이끌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에는 단순히 찬양이 좋아 교회에 머물렀다. 그 덕분에 삐뚤어지지 않고 그럭저럭 삶의 궤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홀로 아이를 키우게 된 순간, 미혼모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편견과 마주했을 때, 그 시린 마음을 데워준 곳 또한 교회의 위로였다. 삶이 나를 배신하는 것 같아 무너질 때마다 다시 신 앞에 엎드렸다.
내 집 마련이라는 목표와 종교가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확신한다. 내가 가장 절망적이었을 때, 때로는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망가지려 할 때 종교가 없었다면 나는 결코 희망을 꿈꾸지 못했을 것이다. 내 집이라는 안정적인 울타리를 소망할 힘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예전에 가장 싫어했던 말.
"신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련만 주신다."
그 말이 가혹하게만 들렸다. 왜 나에게만 이토록 무거운 짐을 지우느냐고 따지고 싶을 때도 많았다. 그 뜨겁고 고통스러웠던 과정은 나를 부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한 '담금질'이었다는 것을. 시뻘건 불 속에 던져졌다가 차가운 물속에 담기기를 반복하며, 비로소 조금 더 나은 어른이 될 수 있었다.
비단 기독교가 아니어도 좋다. 불교든 천주교든, 혹은 그 무엇이든 좋다. 마음 속에 신을 품고 산다는 것은 가슴 속에 희망을 품고 사는 것과 같다. 모든 종교는 결국 사랑과 자비, 소망을 이야기한다. 인간이 인간답게,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버텨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무교인 이들에게도 가슴 속에 의지할 존재 하나쯤은 두라고 말하고 싶다. 내일 당장 쌀이 떨어지는 배고픔이 찾아온다 것은 결국 스스로 쌀을 구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신의 뜨거운 담금질일지도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