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생일지 3
직장 생활이 힘든 건 일이 많아서라기보다 사람 때문일 때가 많다. 소위 말하는 ‘사람이 제일 어렵다’는 말은 어디서나 통하는 진리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지옥 같은 일터를 그럭저럭 버틸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 역시 결국 ‘한 사람’의 힘이다. 운 좋게도 내 기억 속에는 차가운 비바람을 막아주던 든든한 울타리 같은 상급자들이 진짜 ‘어른’으로 남아 있다.
첫 번째 기억은 어느 최고 관리자와 중간 관리자의 기묘한 호흡이다. 당시 우리학교의 최고 관리자는 말 그대로 ‘호랑이’였다. 그는 매일같이 중간 관리자를 사무실로 불러 큰 소리로 다그치고 화를 냈다. 벽을 타고 넘어오는 그 거친 목소리에 복도를 지나던 사람들은 숨을 죽여야만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정작 실무자인 우리들은 그 무서운 분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우리와 직접 얼굴을 맞대는 중간 관리자가 너무나 다정하고 따뜻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실수를 해도 "그럴 수 있어, 다음엔 이렇게 고쳐보자"라며 조용히 가르쳐주는 분이었다.
비밀은 2학기 어느 날 밝혀졌다. 한 동료가 관리자실 앞을 지나다가 최고 책임자에게 엄청나게 깨지고 있는 중간 관리자의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고, 우리는 잔뜩 긴장한 채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이제 우리도 큰일 났다’ 싶던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온 그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그는 방금 겪은 수모를 전혀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부드러운 목소리로 할 일을 전했다.
“상급자께서 이 부분은 조금 더 신경 써달라고 하시네요. 우리가 놓친 부분을 잘 짚어주셨으니 조금만 수정해 봅시다.”
그는 최고 책임자의 고성을 ‘다정한 조언’으로 걸러주는 완벽한 여과기였다. 자기 자존심이 깎여나가는데도 부하 직원들의 평정심을 지켜내던 그 뒷모습을 보며 진짜 리더의 품격이 무엇인지 배웠다. 나쁜 감정은 밑으로 옮기지 않고, 꼭 필요한 정보만 흐르게 하는 것. 그것은 실력이 아니라 성품의 영역이었다.
또 한 분은 거친 남학생들이 가득한 중학교로 새로 오신 최고 관리자였다. 50년이 넘은 낡은 건물, 학교 물건이 망가지는 건 예삿일이고, 학기 초면 학생들의 기 싸움으로 조용할 날 없던 그곳에서 그의 첫 지시는 참 황당했다. 수업 시간마다 5분씩 청소를 하고, 교실 커튼을 항상 예쁘게 묶어두라는 것이었다.
선생님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남학교에서 커튼이 안 찢어지면 다행이지 예쁘게 묶으라니, 다들 현장을 모르는 소리라며 투덜댔다. 하지만 그는 고집스러웠다. 매일같이 복도를 돌며 확인하는 통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커튼을 묶고 빗자루를 들었다. 그사이 그는 여기저기 발로 뛰며 예산을 따왔고, 낡은 학교를 새로 칠하고 부서진 기물들을 새것으로 바꿔주었다.
놀라운 변화는 한 학기가 채 지나기 전에 나타났다. 복도를 뛰어다니며 선생님과 기 싸움을 하던 아이들의 기세가 수그러든 것이다. 교실에 늦게 들어오거나 수업 중 돌아다니는 학생도 없어졌다. 깨끗해진 교실과 정갈하게 묶인 커튼 덕분이었을까. 물건을 부수는 일도 눈에 띄게 줄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눈앞에서 직접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의 진짜 진가는 위기의 순간에 발휘되었다. 그는 평소에도 “선생님이 행복해야 학생도 행복하다”고 말하며, 교사들이 가르치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잡무를 막아주었다. 무엇보다 고마웠던 건 학부모 민원이었다. 그는 선생님들에게 쏟아지는 화살을 가로채 직접 몸으로 막아섰다.
“학부모가 아무리 화가 나도 선생님께 전화할 때와 나한테 전화할 때의 태도가 다릅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이 권위를 민원을 해결하는 데 쓸테니 선생님들은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만 마음을 쓰세요.”
그는 권위가 어디에 쓰여야 하는지 정확히 아는 분이었다. 아래를 향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밖에서 오는 공격을 막아주는 방패로 자기 힘을 쓰는 진짜 어른이었다.
두 분의 상급자를 보며 생각한다. 직급이 올라간다는 건 더 큰 목소리를 낼 자격을 얻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우산이 될 의무를 갖는 것이라고. 나쁜 감정을 걸러주는 거름망이 되어주는 사람, 자기 자존심보다 직원의 평온함을 먼저 챙기는 사람.
나 역시 언젠가 누군가의 선배나 상급자가 된다면,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하고 싶다. “이 비는 내가 막을 테니, 당신들은 당신의 길을 가라”고. 이제는 다시 만나기 힘들지도 모를 그 든든한 뒷모습들을 등대 삼아, 나도 오늘 하루 더 단단하고 다정한 어른이 되기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