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생일지2
출근길이 유난히 쌀쌀하게 느껴지던 어느 아침이었다.
교문을 지나 교무실에 들어서면 아직 출근시간 전이라 고요함이 가득하다.
그 고요함이 나는 좋다.
보리차 한 컵을 내려 책상에 놓고, 컴퓨터를 켜기 전 잠깐 오늘의 할 일을 정리한다.
감사일기, 성공일기, 미래일기.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루틴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내겐 하루를 단단히 붙잡아주는 하루의 시작이다.
아직 근무 시간은 아니지만 나는 늘 조금 먼저 일을 시작한다.
여유롭게 시작하되 고요한 학교 안에서 가장 뜨겁게 집중하는 시간.
그날도 예외는 없었다.
적어도 전화가 울리기 전까지는.
격앙된 목소리의 주인공은 학부모였다.
엊그제 상담했던 학생의 엄마였다.
'무슨 일이지?'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면담요청이 들어왔다.
그 친구는 늘 모범적이고, 조용하고, 성실하며, 교유관계도 원만한 학생이다.
그런 아이가 최근 몇 주간 수업 시간마다 떠든다는 민원이 여러 친구들에게서 동시에 들어왔다.
사실 듣는 순간 조금 의아했다. 아이의 평소 모습과 워낙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를 불러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즘 수업 시간에 친구들이 네가 많이 떠든다고 하더라. 무슨 일 있어?”
그 아이는 최근 몇몇 친구와 수업 중 대화를 많이 나눴다고 말했다.
이해가 되었다. 학기 말이 되면 늘 긴장이 풀리고, 아이들 사이의 친밀도가 깊어지면서 이런 일은 잦아진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주일 동안 네 생활을 조금 지켜보고, 다음 주에 다시 이야기하자.”
그 일주일이 지나 다시 상담을 했다.
실제로 수업 태도는 많이 좋아졌다. 다만 몇몇 학생들이 아직은 조금 더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해왔다.
차분히, 그러나 진심을 담아 조언했다.
“너는 주변 친구들에게 영향력이 큰 아이야. 인기도 많고. 평소 모습처럼 조용하고 성실한 너의 태도는 다른 친구들에게 큰 본보기가 돼. 그 영향력이 좋은 방향으로 쓰였으면 좋겠다. 학업이 어려운 친구들을 돕고 함께 가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 네가 리더의 자질을 키우면 정말 멋진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아이에게 “앞으로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을 스스로 생각해보자”고 제안했다.
그 정도였다.
혼낸 것도 아니고, 강압적인 말도 하지 않았다.
일상의 대화를 하듯 진심으로 잘되길 바라며 몇 마디 전달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틀 뒤 걸려온 학부모의 전화는 모든 것을 뒤흔들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 부모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진상이 아닙니다. 소리 지르지도 않고 욕하지도 않습니다. 이성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목소리의 떨림과 불쾌함이 섞인 억양, 일방적인 확신이 담긴 그녀의 언어는 내가 알던 ‘이성적 대화’의 범주에 있지 않았다.
감정이 실린 말은 계속 이어졌다.
“우리 아이에게 리더가 되라는 말 하지 마세요. 우리 아이는 조용히 졸업하고 싶은 아이입니다. 리더가 되라는 요구는 우리 아이에게 상담을 가장한 강압이고 폭력입니다.”
‘폭력’이라는 단어가 귀에 걸렸다.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 부모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아이의 수업 태도를 집에서 매일 지도하고 있으니 학교에서 지도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아이가 초등학교 때 사춘기가 와서 자해를 여러 번 시도한 적이 있다며, 마음이 약한 아이이니 어떤 지적도 부담을 준다고 했다.
그러니 그 어떤 상담도, 지도도 하지 말라고.
그러면서 믿기 어려운 말을 덧붙였다.
“우리 아이는 여자아이들과 얘기하지 않습니다. 떠들지 않게 하려면 주변을 여자애들로 둘러주면 됩니다.”
나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막막해졌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야기가 이어졌다.
“선생님이 우리 아이에게 ‘영향력 있는 친구니까 본보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면서요?
그 얘기를 듣고 저는 우리 아이에게 ‘니가 악의 축이라는 뜻이네'라고 말했어요!”
나는 말 그대로 충격을 받았다.
사람이 사람에게 악의 축이라는 말을 쓰다니.. 놀라웠다.
아무리 자기 자식이라지만 라포가 형성되어 있다지만 과연 할 수 있는 말일까?
또 리더가 되라는 말이 어떻게 그렇게 '악의 축'으로 뒤집혀 버렸을까.
그저 그 아이에게 ‘너는 훌륭한 모습을 더 키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이야기했는데, 그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받아들였다.
또, 상담 중 '학급에 도움이 필요한 친구가 있을 때 돕는다면 그로인해 배우는 것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에
그녀는 ‘배려는 역차별’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하며, 아들이 누군가를 돕는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해달라고 했다.
학급에는 A라는 학업에 도움이 필요한 아이있었고 짝꿍이었다. 그러나 본인의 아이는 도울 의사가 전혀 없으며 도움을 바라는 것 또한 강요이며 협박이라는 말도 했다.
......'이거 뭐지?'.......
며칠 전 상담에서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하나씩 떠올랐다. 나는 아이에게 비난을 한 적도, 억압적인 말을 한 적도 없었다. 그저 몇 마디 대화를 나눴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상담으로 포장한 ‘강압’이라 말하며, 내 태도를 ‘폭력’이라고 단정했다.
면담 시간, 그 부모는 A4 용지 3장에 적어온 불만과 요구사항을 적어 들고 왔다.
그 안에는 왜곡된 자기 인식과 실제 상황과 맞지 않는 추측들이 가득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세 가지 요구사항이 쓰여 있었다.
상담하지 말 것
A와 짝꿍을 시키지 말 것
(빨간 글씨로) 성적으로 보복하지 말 것
나는 차분히 설명했다.
상담을 하지 않는다는 요구는 100% 수용할 수 없지만, 리더의 자질을 강요하거나 부담을 주는 상담은 하지 않겠다. 짝꿍은 뽑는 것이 학급 규칙이기 때문에 개입할 수 없다. 그러나 노력은 하겠다. 그리고 성적은 당연히 공정하게 처리되니 보복 같은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면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그 부모가 자신은 “진상이 아니다”라고 여러 번 강조한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 문장은 사실상의 선언이었다.
‘나는 내 방식대로 밀어붙일 것이니 받아들여라.’
그 말처럼 느껴졌다.
상담의 말미에 요구사항을 들어주어 감사하다는 커녕 교육청 민원에 변호사까지 대동할 생각이었고 아이와 함께 그 내용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는 말을 남겼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대화가 마음에 남는다.
“나만 잘하면 되지, 나만 손해 보지 않으면 되지.”
그런 생각이 어느새 세상을 가득 메운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라는 개념이 사라진 사회, ‘함께’라는 말이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
결국 이런 마음들이 지금의 팍팍하고 차가운 풍경을 만드는 건 아닐까.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함께 잘 사는 법’을 가르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
작은 불편을 감수하며 공동체를 지켜내는 태도,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
비록 어떤 부모는 그것을 ‘강압’이라 부를지라도, 내가 지켜야 할 교육의 본질은 그곳에 있다.
상담을 마치고 돌아서는 순간, 한숨이 저절로 나왔지만 그래도 다시 다짐했다.
함께 살아가는 법을.
작은 배려가 얼마나 멀리 닿는지,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용기가 얼마나 큰 힘인지,
조금 불편하더라도 서로를 향해 한 발 내딛는 것이 공동체를 어떻게 단단하게 만드는지.
‘그래도 나는 계속 가르칠 것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마음을.’
세상이 아무리 차갑게 변해도, 내 교실만큼은 끝까지 따뜻한 곳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걸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