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혼모 내집 마련기 4
미혼모가 되고 나서, 세상은 순식간에 낯설어졌다.
해맑고 꿈많은 여대생은 하루아침에 ‘남편이 없는 사람’이 되었고, 집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쉼’이 아닌 ‘미안함’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100일된 아이와 대학졸업도 못한 27살 엄마, 살길이 막막했다.
그렇다고 친정엄마에게 기대어 사는 것도 마음이 불편했다. 시집 간 다 큰 딸이 갓 태어난 아이를 데리고 돌아온 날, 엄마의 삶의 무게는 더 무거워졌으리라. 엄마 혼자 딸 둘을 키우느라 평생을 고생하셨는데, 그 엄마 앞에서 또다시 미혼모가 되어 나타난 나는 그 자체로 죄스러웠다.
엄마가 겪은 고단한 삶을 닮은 나를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아팠을까. 엄마는 물질적인 짐보다, 그 마음의 짐이 더 무거웠을 것이다. 나 또한.
그 당시 대학생이던 동생도 나 때문에 교생 실습도 미루고, 내 대신 알바를 해 생활비에 보태며 학업과 임용고시 공부를 이어가고 있었다. 가족 중 누구 하나 평온하지 않았다.
나는 결심했다.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 다시 내 발로 서겠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통장에는 몇만 원이 전부였고, 갈 곳도 없었다. 밥은 굶지 않지만, 누구하나 눈치주는 것이 아니라 나와 아이를 위해 더 노력하는 가족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
그때 주민센터(현, 행정복지센터) 복지과를 찾았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발걸음이었다.
미혼모 커뮤니티를 통해 '모자원'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복지과 직원 또한 처음 만나보는 미혼모에게 어떤 도움을 줘야할 지 막막해하셨다.
"꼭 모자원에 가고 싶어요.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함께 살면서 자립을 준비하는 곳이래요.”
"갈 수있게 신청서 좀 넣어주세요"
간절했다.
그리고 적극적인 복지과의 도움으로 모자원에 입소하게 되었다.
처음엔 선뜻 믿기지 않았다. 나와 J가 살 수 있는 안락한 집이 생긴 것이다. 미닫이 문으로 연결되어있는 지금으로 치면 1.5룸쯤 되는 방이었고, 조그만 베란다로 햇볕이 빼곰히 들어와 나와 J의 얼굴을 간질이는 곳이었다. 포근했고 따뜻했다.
첫 보금자리 기념으로 새로 산 한 칸짜리 하얀 옷장과 작은 서랍장, 새이불, 선풍기, 두 개씩 준비된 식기류와 냄비 두 개. 하나는 냄비밥을 하기 위한 용도였다. 저녁에 냄비밥을 하면 아침에 냄비에 누른 눙룽지로 아침을 해결했다. 우리 보금자리가 생겼다는 이유하나만으로도 벅차서 하루 두 세번 씩 비질과 걸레질을 했다.
모자원 밖의 사람들은 뭐라고 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좋았다.
“여기서 다시 시작하자.”
모자원의 하루는 단순하지만 치열했다.
아침엔 어제 만든 냄비에 눌러있는 누룽지와 김치로 아침을 먹고 J와 어린이집으로 향한다. 언덕을 넘어야 갈 수 있는 곳이어서 가는 길, 공장도 있고 자동차 운전 면허학원도 지나지만 이내, 언덕 위 나무들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두 손 꼭 잡고 이 얘기 저 얘기 하며 상쾌한 기분으로 J와 데이트를 했다. 맑은 날도 좋지만 비가 오면 비가 오는래도, 눈이오면 눈이 오는 대로 아이와 함께하는 등하원길은 즐거웠다. 그리고 나의 뜀박질이 시작된다. 많은 설문지 인터뷰를 하려면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여야했다. 간간히 식당 단시간 아르바이드 있다면 그 또한 운수 좋은 날이었다. 퇴근 후엔 자립 프로그램이나 상담이 이어졌다. J와 그 속에서 나는 점점 ‘살아남는 법’이 아니라 ‘살아내는 법’을 배웠다.
모자원에서는 모든 입주자가 매달 일정 금액 이상 저축을 하고 검사를 받아야했다. 얼마를 벌었고 얼마를 썼으며 얼마를 저금했는지... 처음엔 의무처럼 느껴졌지만, 곧 그게 나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었다. 가계부 쓰기 까지는 아니지만 매달 정산을 하며 살림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어 좋았다. (물론, 재정 간섭까지 하는 모자원의 이런 방식이 옳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
60% 저축이 기준이었지만 60%의 저축도 만족하지 못한 나는 소득의 70~80% 정도 저축을 했다. 설문지 아르바이트가 잘 되는 달이면 늘어난 소득만큼 저축을 이어나갔다.
누군가는 “그게 가능하냐”고 묻겠지만, 가능했다.
술 담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커피도 마시지 않으며 꾸미는 것에 재능이 없는 탓에 소소한 먹거리와J를 위한 교육비, 피복비 외에는 돈을 쓰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70% 저축을 달성하면 나와 J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 먹으며 자축했다. 소소하지만 어묵집을 지나며 사먹는 어묵 한 꼬치, 떡볶이 한 접시가 참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모은 돈이 어느새 내 손에 ‘종잣돈’이 되어 돌아왔다.
살아보니 알겠다.
‘돈’은 단순히 생존의 수단이 아니라 ‘존엄’을 지키는 도구였다. 누구의 도움에도 의존하지 않고 아이의 밥을 차려줄 수 있는 힘, 그게 진짜 부자였다.
3년이 흐른 뒤, 나는 모자원을 나왔다.
그때 손에 쥔 돈은 크지 않았지만, 마음은 든든했다. 그 돈을 보태 당당하게 친정엄마의 집에 입성해 작은 전셋집을 얻었다. 우리 가족에게 처음.....전세집이 생긴 것이었다.
밤마다 J가 “우리 집이야?”라고 묻던 그 순간, 나는 세상 어떤 부자보다 부유했다.
지금도 나는 그때의 습관으로 산다. 월급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저축부터 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이건 미래의 나에게 주는 선물이야.”
돈을 모으는 일은 단순히 숫자를 쌓는 일이 아니다. 그건 내 삶을 주체적으로 설계하고, 누구의 보호막 없이도 설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과정이다.
모자원에서 배운 건 바로 그것이었다.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나의 책임, 나의 자립.
현재 내가 따르는 저축 원칙은 간단하다.
수입의 50%는 필수 지출, 30%는 미래 준비, 20%는 비상금 및 자기계발이다.
이 비율을 상황에 따라 조금씩 조정했지만, 핵심은 ‘저축을 먼저’라는 점이다.
모자원 시절에는 70%를 저축해야 했지만, 그 경험 덕분에 지금은 자연스럽게 이 구조가 몸에 배었다.
생활비를 먼저 쓰고 남은 돈을 모으는 사람은 결국 늘 돈이 모자라지만, 저축을 먼저 하고 남은 돈으로 사는 사람은 언젠가 자유를 얻는다.
모자원은 내게 단순한 쉼터가 아니었다. 그곳은 내 인생의 기초공사 현장이었다.
그때의 다짐과 습관이 지금의 ‘내 집 마련’이라는 결실로 이어졌고, 이제는 나처럼 길을 잃은 또 다른 엄마들에게 “당신도 다시 설 수 있다”고 말해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