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뜨거움은 나를 흠씬 두들겨 팼고 녹초가 된 나는 눈만 깜빡이며 누워있었다. 상념과 망각.
불현듯 몇 년 전 코로나로 누워있을 때가 생각났다. 침 삼키기도 힘들었던 그때,내가 할 수 있는 건 핸드폰으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뿐이었다. 그때 이런 글을 썼었다.
코로나에게
네 덕분에 일주일을 놀았어.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게.
깜짝 놀랄 만큼 아팠고
방 밖으로 나가기도 주춤했으니까.
사탕을 입에 물고 기침을 하며 생각했지.
무엇을 할까?
처음엔 어쩔 수 없이,
나중엔 기꺼이,
난 죄책감 없이 핸드폰으로 시간을 죽였어.
몸은 제 페이스를 잃고 흐느적거리고
마음은 정지된 시간 안에 있지만,
버리지 못해 여기저기 넘쳐나는
쓰레기를 보면서
난 지금 내 마음의 쓰레기를 구분해.
시간을 죽이며 접했던
많은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느낌이고.
그래서 어쩌면 조금은 고마운지도 몰라.
그때처럼 난 여름에게 말한다.
여름에게
네 덕분에 쉼을 누리고 있어.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게.
그동안 보여준 내 사랑을 조롱하는 것 같아
너무 많이 아팠으니까.
...
누군가 보여준 눈물의 의미와
내 사랑을 거부한 마음을 알 것 같아
마음 한 평을 선물을 받은 느낌이고.
그래서 어쩌면 조금은 고마운지도 몰라.
여름이 힘들었던 건 한마디 말을 듣지 못해서다.
'오해해서 미안해.'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나는 끝내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그런데 사실 잘 생각해 보면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난 "신이 널 아주 많이 사랑해." 이 말을 신을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나의 경솔함과 얕은 생각이 모두를 힘들게 만들었고, 나 또한 힘든 여름을 보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알 거 같다. 왜 그랬는지.
난 이번 여름을 지나면서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 그토록 잘해주고 싶어 했는데 왜 내 마음을 거부했는지. 힘겨움을 대가로 마음의 땅 한 평을 얻었다.
'오해해서 미안해' 소리를 듣지 못한 건 나의 죄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언젠가 신이 나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그 사랑이 전해지길 기도한다.
어쩌면 나의 사랑은 믿는 사람들에게도 전해지지 못했을 수 있다.
한 달간 새벽기도로 준비했던 교회 영적 대각성집회에서 강사님이 '기적을 구하는 은사주의에 젖어있는 사람들은 십자가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를 보고 하신 말씀은 아니지만 그 말은 나를 주춤하게 했다.
난 예배를 드릴 때 수련회에서 처럼 큰 소리로 찬양하고 큰 소리로 방언기도를 한다. 매 순간의 예배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예배라는 마음으로 찬양하고, 기도하다 보면 소리가 커진다. 그래서 나의 모습은 누군가에게는 은혜고 누군가에는 민폐다.
게다가 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 없으면 이 땅을 하나님 뜻대로 살아갈 수 없기에 모두에게 능력주시 길 구하고 있었다.
며칠 전 은사주의, 신사도운동 등을 검색하며 나 자신을 점검했다.
성서 어디에도 기적에 집중하라고 가르치는 부분은 없다. 그렇다고 또 무시하라고 가르친 부분도 없다. 결국 해석과 적용의 문제다. (나무위키, 신사도운동 중)
철학의 흐름처럼 기독교도 많은 ~주의가 흐름을 탄다. 상황과 시대에 따라 유리한 방향으로 방향을 틀고 서로를 비난하기도 한다. 여러 검색을 하고 드는 생각은 그 배경과 동기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인가다.
난 기적만을 구하지 않는다. 십자가 사랑을 알기에 받은 사랑이 너무 커서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 누군가에게 다가간다.
청소년부 예배에서 조차 마음에 오는 대로 울면서 찬양하고 큰 소리로 기도하기에 가끔은 이렇게 기도한다. 이게 틀린 거면 내 목소리를 걷어가시라고.
예쁘게 칠해진 색을 긁고, 죄의 검은색과 시기의 노란색을 뿌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 되어 향기 내길 원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흰색과 그 색들을 굳이 꽃으로 만들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