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갈한 모습의 꽃을 피웠던 꽃사과가 열매를 냈다. 아직은 연둣빛인 꽃사과 두 개가 배꼽을 보이며 달려있다.
난 거기에 내 상상의 아이들을 넣어봤다. 둘 다 눈을 내리깔고 있다. 서로를 그리워하거나 사색을 하는 건 아니다. 서로 잘 모른다. 그냥 우아하게 졸고 있는 거다. 자게 놔두자. 조금 있으면 바람이 늦었다고 호들갑을 떨며 지나갈 거다. 앞을 못 본 바람이 나무에 부딪쳐 가지를 흔들고, 그 바람에 박치기를 하면서 깜짝 놀라 깰 거다. 어쩌면 그러고도 다시 잠들지도 모른다. 그동안 너무 피곤했으니까.
박치기라...
출근길에 내 얼굴은 땅을 박았다.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넘어져 땅에 닿았던 얼굴이 아직도 살짝 부어있다.
난 넘어진 날 이런 글을 썼다.
그 안에서 꿈꾸다
땅에 처박힌 얼굴을 일으켜 먼지를 턴다.
얼굴이 박하사탕을 물은 듯 화하다.
하늘하늘 얇은 바지가 최선을 다했나 보다
땅을 찍은 무릎이 피를 내지 않았다
아이는 땅의 공격을 잘 막았다고 환호하지 않는다.
하늘거리는 바지를 보며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전쟁터 같은 삶,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제 아이는 전쟁을 끝내고 아름다움을 찾으려 한다.
주어진 삶의 터전에서 인내가 피어내는 꽃을 찾고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꿈을 꾼다.
여름이라 얇은 천의 하늘거리는 바지를 입고 있었다. 무릎이 긁히기는 했지만 옷이 상하고 피가 나지는 않았다. 난 땅에 닿은 부분이 상한, 그 바지를 보며 뜬금없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든 건 아마 며칠 전 가정폭력으로 집을 나온 분과 그 가정 이야기 때문일 거다. 난 얼얼한 얼굴을 만질 때마다 그분을 생각했다. 맞고 나서도 한참을 느껴야 하는 고통과 고통에 동반되는 그때의 기억.
지금껏 폭력에 시달리며 버틴 건, 저항할 힘이 없는 여린 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거다. 누군가의 엄마이기도 했으니까.
대부분은 다르게 생각하실 거다. 나 또한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다른 선택을 하라고 얘기할 거다. 다만 난, 그동안 인내했던 그분의 삶이 허무에 묻히고 이야깃거리가 되는 게 아니라 빛을 발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여린 이의 핏방울이 사방에 흩어져 생긴 붉은 자국이 새빨간 장미꽃잎되어 한 송이 꽃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꽃을 누군가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아울러 잠깐이라도 내 상상의 아이들처럼 편히 눈을 붙였으면 좋겠다. 그동안 너무 피곤했으니까.
난 끊임없이 전쟁 중이었다. 나의 전쟁은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 삶에서 맞닥뜨리는 상황들이었다. 이제 난 그 상황들을 안고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싶다. 내가 찾는 아름다움은, 오랜 시간 인내로 만들어 낸 빛이 눈물에 닿을 때의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음을 표현하고 기억하고 싶다.
그래서 눈물을 그려봤다. 삶을 지탱하게 하는 사랑과 보호, 흩어지지 않고 뭉칠 수 있는 힘을 초록 테두리로 표현했다. 견고하지 못하고 듬성 듬성하지만 두 겹이라 틈이 별로 없다. 눈물의 안쪽에는 다양한 색들의 꽃들을 그리고 뭉갰다. 꿈의 좌절처럼. 그 위에 다시 흰색으로 , 그 안을 다시 옅은 색으로 칠했다. 옅은 빛이나마 꿈이고 희망이다. 밖은 타인의 시선과 질투, 위험 등 헤처온 과정이다. 붉은빛 핏자국도 있다. 눈물은 아래로 흐리지만 머리는 위를 향한다. 오랜 시간 인내로 만들어 낸 빛과 닿기 위해.
사랑을 연료 삼아 불을 밝히는 희망의 등. 희망의 등 없이 살 수 있을까?
가끔은 눈앞이 깜깜할 때가 있다. 그런데 꺼졌다고 생각한 등을 잘 보면 보일락 말락 한 희미한 불빛이 보인다. 우리 삶은 그런 거다. 잘 보고 찾으면 된다. 사랑을 공급할 누군가가 꼭 옆에 있을 거다. 그런데 그 사랑은 기대와 다른 종류의 사랑일 거다.
누구의 애씀도 하찮지 않다. 나의 결핍을 빛 삼아 다른 이의 결핍을 사랑으로 채워주면 좋겠다. 희망의 등을 서로 밝혀주며 서로를 기대로 바라보면 좋겠다. 언젠가 그 기대는 현실로 이루어질 거다.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