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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프러포즈

예비 시어머니가 예비 며느리에게

by HAN

큰아이가 결혼을 몇 달 앞두고 있다. 새 아가가 될 아이의 생일을 앞두고 이런 편지를 적어봤다. 상상의 프러포즈다. 이런 긴 손 편지를 받는다면 어떤 마음일까? 몇몇 젊은 지인들에서 의견을 물었더니 모두 난색을 표한다.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난감할 거 같다고~^^ 답장을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주위 사람들의 만류로 전달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이곳에 마음을 남겨둔다.




OO야, 이제 우리 가족이 되는구나.

참 반가워. 너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어.


이건 앞으로 시어머니가 될 내가 너에게 건네는 작은 프러포즈야. 좀 늦었지?


처음 널 만난 날이 지금도 생생해. 수줍게 웃던 얼굴, 양손 가득 든 선물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생각하며 골랐을 너의 마음이 내게 깊이 와닿았어. 그리고 어버이날이 다가오면서 문득 돌아가신 아빠 생각이 났어. 그런데 그 빈자리에 네가 있는 것만 같았어. 상견례 날도 아빠 기일 즈음이었잖아. 가족들과 추모공원에 갔던 날이라 자연스레 아빠 이야기를 하면서도 너를 이야기했지. 나에게는 그렇게, 아빠와 네가 연결되며 이미 예비된 사람처럼 다가왔어.


사실 아들이 처음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땐 조금 두려웠어. 내 영역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온다는 게 낯설게 느껴졌거든. 나의 어색한 반응에 아들이 오해했을 수도 있어. 네가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하지만 너의 편안한 성격 덕분에 이제는 자연스럽게 가족이 된 것 같아. 참 감사한 일이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얼마나 큰 행운일까!

아들이 이렇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걸 처음 봤어. 너에게도 나의 아들을 만난 것이 행운이길 바라.

살면서 어려운 순간이 찾아오면 조금만 기다려주고, 대화로 잘 풀어나가길 바라. 혹시 대화로도 해결되지 않는 순간이 오면 나를 찾아와. 마법 같은 해결책을 주진 못해도, 너를 꼭 안아줄 수는 있어. 그러면 나의 작은 온기가 너에게 조금은 위로가 될 거야. 네가 현명한 사람이란 걸 알고 있어. 그 지혜가 너와 아들, 그리고 우리의 관계를 더욱 빛나게 할 거야.

아들은 아직 젊고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내 눈에는 원석이야. 나는 내가 보는 눈이 맞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거든.

너를 만나기 전날,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림을 그렸어. 사실 그림이랄 것도 없지. 네임펜으로 생각나는 대로 선을 긋고 색을 입힌 정도니까. 하지만 그전까지는 검은색만 쓰다가, 처음으로 색을 입혀봤어. 조금 산만하고 복잡해 보이기도 하지만, 네 마음과 재능을 보는 것 같았어. 너는 아들과는 또 다른, 빛나는 원석이야. 네가 지닌 많은 재능을 마음껏 펼치며, 선한 영향력을 전하기 바라. 이 편지와 함께 그 그림을 선물할게.

이미 두 개의 그림을 선물했으니, 이번엔 있는 그대로 줄게. 누군가 그러더라. 그림을 두 개 이상 선물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 조금 더 편해질까?

젊은 시절 나는 이과적인 성향이 강했어.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딸 다섯을 키우신 엄마의 영향 때문일 거야. 엄마는 딸들이 혹여나 무시당할까 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똑똑하게 굴라"라고 하셨어. 헌신적인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감성적인 부분을 닫아두고, 공부만 했던 것 같아. 두리번거릴 여유도, 새로운 걸 시도해 볼 용기도 없었지.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감성을 끄집어내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됐어. 이제야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는 게 나도 웃겨. 나이가 들수록 상상의 세계에서 더 행복을 느끼는 것 같아.

똑똑해야 한다는 틀을 깨고, 타인의 아픔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건 신앙과 삶의 풍랑 때문일 거야. 요즘은 ‘삶의 풍향이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 삶의 시행착오를 다른 사람들이 덜 겪길 바라. 그래서 조금이라도 덜 아프길.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만들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라도 되길 바라면서.

내 시행착오 중 가장 큰 부분이 아이들에게 충분히 사랑을 주지 못한 미안함이야. 그래서 난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꿈꿔. 그리고 내게 ‘아이들’이란 너도 포함해서, 젊은이들 모두를 의미하는 거야.


네 지난 삶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행복한 기억만 있는 건 아니겠지. 크건 작건, 삶의 풍랑은 누구에게나 불어오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 여정을 통해 소중한 것들을 찾고, 무엇을 간직할지 선택하는 것 같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네가 지닌 소중한 것들의 결이 나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어.

요즘은 문화가 많이 바뀌었지만, 예전에는 교회 아이들을 많이 안아줬었어. 오랜 시간 함께한 몇몇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내게 안기고 나를 안아주곤 했지. 너도 언제든 그렇게 편하게 다가와도 돼. 난 너를 평가할 생각이 없어. 사실, 내가 평가받는다면 너보다 낮은 점수를 받을지도 몰라. 내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내 자리를 지킨 것과 아이들이 성장한 후에는 내 의견을 강요하지 않은 것 정도니까.

바쁘게 살았지만, 돌아보면 무언가를 했던 순간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바라만 봤던 순간들이 더 많았던 것 같아. 그래도 사랑의 마음이었기에, 어딘가 먼지처럼 이라도 남아 있겠지. 사랑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두서없는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네. 여기까지 거리낌 없이 읽었다면, 넌 이미 나의 며느리로 무조건 합격! ^^

앞으로 우리가 함께할 시간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지만,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사뿐히 걸어가자.


생일 진심으로 축하해. 널 만나게 돼서 참 기쁘고 감사해. 이렇게 곱고 밝게 키워주신 부모님께도 감사하고. 어떤 선물을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했어. 그래서 이렇게 장문의 편지를 쓰게 됐네. 선물인지, 고문인지 모르겠지만. ^^ 이렇게 긴 손 편지를 쓰는 건 나도 처음이야.

이 편지의 길이만큼 마음을 담아, 널 사랑해.


이 정도의 마음이면, 나의 아가가 되어줄 수 있겠어?


2025. 3.

예비 시어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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