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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으로 바라보는 나

아직 말이 되지 않은 감정들과 함께 머무는 시간

by HAN
나는 두려움에 맞서는 나를
기다림으로 바라본다.
다그치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서서.
어린 나와 같이 웃고,
같이 조용히 눈을 감기도 하며.


요즘 내가 쓰는 글은

예전처럼 다가오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뭔가 결이 달라졌다고,

조금 산만하고,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불안에 맞선 아이의 시선을 담고 있어서일 것이다.

내 안에는 아직 치유되지 않은 마음의 분노가 남아 있다.


하지만 그 감정은

나만의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치유받지 못한 상처는 누구에게나 있고,

그 안에 고요하게 감춰진 분노는

모두의 연약함일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이해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한 마음의 결이

누군가의 마음 어딘가에

조용히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감정을

나는 먼저 그림으로 꺼내놓았다.

푸른 선도 없고, 윤곽도 없이

붉은 선 하나가 안쪽을 뚫고 지나가는 그림.

해석하지 않은 감정, 경계 없이 흘러나온 마음이었다.


그림이 완성된 뒤

무언가가 빠진 것 같다는 느낌이 오래 남았다.


며칠 후, 나는 다시 그림을 그렸다.

이번엔 푸른 선으로 그 감정을 감싸주는 경계를 만들었다.

분노는 여전히 중심에 있었지만,

그 선 하나 덕분에 감정이 흔들리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그림은 더 조용해졌고,

나는 그 감정을 조금은 다르게 바라볼 수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글을 왜 올리냐고 물었었다.

나는 이 글을 누구를 향해 쓰는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에게 읽히기 위해 쓰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아직 말이 되지 않은 감정들,

그림으로 먼저 다녀간 마음의 선들이

누군가의 안쪽에

기척처럼 스쳐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말이 닿지 않아도 된다.

존재의 한 조각이

잠깐 머물렀다 가는 울림으로 전해지면,

그것만으로 나는 괜찮다.


분노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 감정을 없애야 한다고 여기기보다,
지금은 그저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그것을
담담히 바라보려 한다.

감정이 다 흐를 때까지.


이 글이,
나처럼 아직 치유되지 않은 감정을 안고
조용히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아도 되는

작은 틈이 되기를 바란다.

감정이 먼저 나왔고, 경계는 그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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