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전쟁, 그리고 평화 협정

만성 염증과 전자약의 이야기

by HAN

사라지는 빛들을 보며 울었어.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거든.


어느새 다가온 새들의 지저귐.
나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어.
처음 경험하는 붉은빛들의 열정.
모든 것이 다시 생명을 찾는 것 같아.


그런데 뭔지 모를 두려움이 몰려와.
식을 줄 모르는 열정에 숨이 막혀.
어느새 그 열정이 나를 잠식하는 것 같아.


누군가 말했어.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이제 그만해야 한다고.


난 그냥 손을 놓고 눈을 감았어.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오겠지.


그런데 이번엔 뭔가 달라.
금빛 조명이 비추이는 것 같아.
그건 네 눈빛인가 봐.


그 순간 알았어.
이건 빛과 어둠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끝나지 않는 전쟁이었다는 걸.




꺼지지 않는 불, 만성 염증

어떤 전쟁은 잘못된 지휘관이 아군을 향해 총을 겨누는 데서 시작되고,

어떤 전쟁은 끝난 줄 알았던 불씨가 잿더미 속에서 되살아나

조용히 도시를 삼켜버립니다.


자가면역이든, 대사 이상이든, 노화든 —
그 모든 불씨가 만들어내는 전쟁의 공통된 이름은 만성 염증입니다.


염증은 원래 몸을 지키는 경비병입니다.
상처나 감염이 생기면 면역 세포들이 달려와 불을 지피고 적을 소탕합니다.
그 불은 적이 사라지면 꺼져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경비병이 철수하지 않습니다.

자가면역질환: ‘아군과 적군의 경계’를 잃었을 때

대사질환: ‘과잉 영양과 노폐물’이 적으로 인식될 때

노화: 세포 손상 신호가 계속 울릴 때


그 불은 주변을 태우기 시작합니다.
급성 염증이 방패라면, 만성 염증은 칼날입니다.


몸의 잊혀진 언어: 미주신경

미주신경.png

우리 몸에는 염증을 스스로 조절하는 ‘염증반사’ 시스템이 있습니다.
그 핵심 통신선이 바로 미주신경(Vagus Nerve)입니다.


콜린성 항염증 경로(CAP)에서는 미주신경의 전기 신호가

아세틸콜린이라는 메신저를 분비하게 하고,

이 메신저가 면역세포의 TNF-α 생산을 멈춥니다.

즉, 전쟁을 멈추라는 ‘평화 협정문’을 전달하는 셈입니다.


참고로 ‘미주(Vagus)’라는 이름은 ‘방랑하다’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습니다.
뇌에서 시작해 온몸의 장기를 ‘방랑’하며 지휘하는 이 신경의 특징을
아주 잘 보여주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만성 염증과 전자약 적용

만성염증과 전자약.png

전자약은 우리 몸의 신경–면역–대사 네트워크에 직접 말을 겁니다.
과잉 반응만 골라서 억제하고, 필요한 면역 반응은 그대로 유지합니다.
그렇다면 이 기술이 각 질환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자가면역질환입니다.
이는 단순히 면역 반응이 강하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몸의 군대 중 일부인 T세포와 B세포가 길을 잃고 아군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염증 신호를 주고받는 사이토카인 네트워크가 균형을 잃어 폭주하고,
장 속의 미생물 환경까지 변하면서 염증이 쉽게 발생하는 토양이 만들어집니다.
미주신경 자극(VNS)은 이 혼란스러운 회로를 진정시키는 사령부의 명령과 같습니다.


다음은 대사성 질환입니다.
비만이나 제2형 당뇨병과 같은 질환의 배경에는 ‘저강도 염증’이라는 잔불이 있습니다.
비만 세포는 단순한 지방 저장소가 아니라, 염증 물질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공장입니다.
이 물질들이 전신으로 퍼져 인슐린 저항성을 유발하고, 혈당 조절이 어려워집니다.
전자약은 자율신경계의 균형을 회복시켜 이러한 불씨를 줄이는 데 도움을 줍니다.


호흡기 질환은 또 다른 양상입니다.
천식이나 COPD는 폐와 기도의 면역 반응이 과민해져,
작은 자극에도 염증 반응이 길게 이어집니다.
경피적 미주신경 자극(tVNS)은 이 과민한 경보 시스템을 조율하여 숨길을 넓혀줍니다.


심혈관 질환에서는 부교감신경 활성 저하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브레이크가 고장 나면 심장은 계속 과속 상태로 달리게 됩니다.
VNS는 브레이크를 복구하여 심박 변이도를 회복시키고, 염증 마커를 낮춥니다.


마지막으로 신경계 질환입니다.
알츠하이머병과 파킨슨병에서는 신경 염증이 병의 진행을 가속화합니다.
미주신경 자극은 BDNF를 증가시키고 뇌혈류를 개선하며, 염증 반응을 줄이는 효과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는 손상된 뇌 회로가 일부 회복될 가능성도 열어줍니다.


전쟁에서 대화로

기존 치료가 ‘전면 무장 해제’였다면,
전자약은 ‘정밀 협상’입니다.


무차별 폭격이 아닌, 필요한 부분만 조율하는 방법입니다.
그 중심에는 미주신경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몸속 전쟁을 멈추고 대화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

이번 편이 ‘전쟁터의 휴전’이었다면,
다음 편은 마음의 회로를 잇는 이야기입니다.


우울, 불안, PTSD와 같은 마음의 상처 속에서
전자약이 어떻게 뇌와 감정의 회로를 다시 연결하는지,
그 새로운 가능성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붉은 빛 안에서 갈망.jpg 붉은빛 안에서의 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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