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그림자

by 종호날다

바이크 여행 중 오랜만에 찾은 고향 집은 이미 다른 이의 집이 되어 있었지만 감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었다. 열 배로 자란 감나무는 늦가을 햇살 아래 주황빛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문득, 어린 시절 아버지의 뒷모습이 감나무 그림자처럼 드리워졌다.

나는 늘 활동적이고 즉흥적인 아이였다. 계획 없이 일을 벌였고, 수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다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오거나 숙제를 미루다 혼자 울상을 짓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도대체 니는 누굴 닮아서 그렇노!” 하며 혀를 차셨지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내게 큰소리를 내지 않으셨다. 그저 말없이 그림자처럼 묵묵히 나를 지켜보실 뿐이었다.

어떤 위험한 장난을 쳐도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려도 아버지는 쉽게 화를 내지 않으셨다. 그 큰 손으로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지그시 바라보실 뿐이었다. 그 눈빛 속에는 훈계 대신 알 수 없는 깊은 인내와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당시에는 그저 ‘우리 아버지는 참 무뚝뚝하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너무 조용해서 ‘나에게 관심이 없는 건가??’ 하는 서운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나는 벌써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아이들의 얼굴을 마주하면 내 안에서 불쑥불쑥 화가 솟구쳐 나온다. 사소한 일에도 버럭 화를 내고 잔소리를 쏟아낸다.

아이들이 장난감 정리를 하지 않거나, 숙제를 미루거나, 투정을 부릴 때면 “아빠 말 좀 들어라! 너거는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노!” 하고 소리치곤 한다. 그리곤 아이들이 시무룩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면 문득 나의 어릴 적 모습과 아버지의 묵묵한 눈빛이 오버랩된다.

그때마다 가슴 한구석에서 후회의 한숨이 터져 나온다. 철없이 뛰어놀던 어린 날의 나는 아버지 눈에 얼마나 계획 없고, 의지 박약하며, 바보같이 보였을까? 아버지는 얼마나 나를 타이르고 싶으셨을까? 얼마나 화가 치밀어 오르고, 또 얼마나 깊은 한숨을 내쉬었을까?

당신의 침묵 속에서 나를 향한 걱정과 안타까움이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울려 퍼졌을 텐데, 어린 나는 그 어떤 것도 헤아리지 못했다. 그때 아버지의 침묵은 나를 향한 가장 큰 사랑과 배려였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삶의 지혜를 알려준다는 이유로 화를 내며 타이른다. 어쩌면 이 모습은 내가 겪었던 과거의 어리석음에 대한 후회를 아이들에게 단적으로 보여주고 싶어서 일지도 모른다. 내가 겪었던 시행착오와 어리석음을 내 아이들만큼은 겪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만약 아이들이 삶의 교훈을 위해 꼭 경험과 착오를 겪어야만 한다면, 나는 그것이 이른 시간에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늦어진 깨달음은 회복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집 앞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버지의 묵묵한 뒷모습이 이제야 비로소 삶의 커다란 가르침의 그림자로 다가온다. 그 침묵은 사랑이었고, 인내였으며,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는 지혜였다. 나는 그 지혜를 이제야 조금씩 배우는 중이다. 그리고 이 배움을 나의 아이들에게는 후회라는 이름의 설명서가 아닌, 사랑이라는 이름의 인생 나침반으로 전해주고 싶다. 묵묵히 갈 길을 알려주는 나침반처럼, 아이들이 스스로 삶의 방향을 찾아갈 수 있도록.


나는 오늘부터 조금 더 묵묵히 그들의 뒤를 지켜볼 것이다.

어쩌면 그 길 위에서 아이들도 언젠가 나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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