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아티스트 #한국편 ① 이배
형색색의 유화 사이에서 검은 숯이 뿜는 우아함은 눈에 띈다. 그래서일까?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숯'은 더 돋보이는 존재다. 실제로 2018년 이배 작가는 프랑스 정부에서 문화예술에 기여했다는 의미로 수여하는 '프랑스 문화예술 훈장 기사장(Chevalier des Arts et des Letter)'을 받았다. 2022 프리즈 서울에서는 생 로랑과 컬레버래이션을 진행하기도 했다.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유럽 미술계에 한국의 수묵화 정신을 알려왔던 이배. 그가 30년 동안이나 작품 세계의 중심으로 삼은 '숯'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숯은 불이 지나간 후에 모습을 드러낸다. 단단한 나무가 탄 후, 새카만 모습은 흔히 '죽음'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배에게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숯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마지막 모습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불을 붙이면 다시 불이 붙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생명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즉, 죽음을 의미하는 단절이 아니라 살아 있는 '순환'을 상징하는 것이다.
숯이 보여주는 검은색은 한 가지 색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색'을 포용하는 깊이를 말한다. 검은색 하나만 놓고 봐도 그렇다. 차가운 검정, 뜨거운 검정, 잿빛 검정, 회색빛 검정, 금속처럼 빛나는 검정… 검은색이 보여주는 다채로움을 잘 드러내는 작품은 '불로부터' 연작이다. 숯 표면을 광이 흐를 만큼 갈아 숯 단면을 드러낸 작품에서는 검은색이 각도에 따라 다른 빛을 낸다. 검은색은 '빛'까지도 흡수한 색인 셈이다.
그 속성과 색을 넘어 숯 자체가 가지는 의미도 특별하다. 이배가 생각하는 '숯'은 한국의 뿌리다. 유럽 미술계가 이배를 주목한 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유럽의 전통인 유화는 그 문화권에 속한 예술가들이 가장 잘 이해하고 잘 표현할 수 있듯이, 숯도 마찬가지다. 거대한 수묵 문화권 출신인 이배보다 숯을 이해하고 잘 다룰 수 있는 예술가는 파리에 없었으니까.
"나는 수묵의 나라에서 왔는데, 숯이란 먹을 만드는 재료다. 한국에서는 녹색 대나무도, 난초도 초록색이 아니라 검게 그린다. 수묵화는 정신을 그리는 것이다." - 이배
'숯'은 한국의 생활과도 깊이 연결된다. 옛날에 아기가 태어나면 대문에 숯을 매달아 걸기도 하였고, 한옥을 지을 때도 땅 안에 숯을 넣어 습도를 낮추기도 했다. 한국, 일본, 중국 등 아시아 지역에서만 쓰이는 재료인 '먹' 역시 '숯'으로 만든다. 숯은 한국 고유의 문화인 것. 그렇다면 먼 타국에서 이배가 그리는 한국 고유의 '수묵화 정신'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좌) 빈센트 반 고흐, '올리브 나무'(1889) 중 일부 상세 컷, ⓒArtvee
(우) 이배, '붓질-33'(2020), ⓒArtsy
서양화가 '색'의 세계라면 한국화는 '먹'의 세계다. 서양 예술가가 작품으로 '자기 능력'을 드러낸다면 동양 예술가는 작업을 '자기 수양의 방편'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작품 기법과도 연결되는데 서양화 기법은 캔버스 위에 두꺼운 질감이 드러날 만큼 물감을 쌓아 올리는 것이라면, 동양화 기법은 칠할수록 안으로 스며드는 방식이다. 이배가 예술을 대하는 태도와 그 작업 과정 역시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수행'에 더 가깝다.
황토 가마 안에서 통나무를 1,000℃ 이상의 고온에 두었다 식히기까지는 꼬박 한 달이 걸린다. 이렇게 만들어진 숯을 다시 톱으로 썰고 깎아 작품으로 빚는 이배의 모습은 숙련된 기술을 연마하는 장인 같기도 하다.
이배는 예술가에겐 '태도(attitude)'와 '과정(process)'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매일 같은 시간에 하는 일정한 반복을 견디며, 그 과정에서 자기의 세계관을 덧입히면서도 그것이 일관성을 띄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은 불현듯 찾아오는 영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서서 작업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는 그의 정신은, 우리가 잊고 있던 또 다른 감각을 일깨운다.
*표지는 2021년 홍콩에서 전시됐던 작품 ⓒgalleriesgal
글 원윤지
※ 누적 회원 13만 명을 보유한 아트테크 플랫폼 T사 앱 매거진과 블로그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게재본과 일부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