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아티스트 #미국편 ⑨ 헤르난 바스
놀이공원은 현실이 아니라 만들어진 낙원이다. 추락하거나 질주하는 등 각종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즐거워한다. 바로 '보장된 안전'이라는 울타리가 있기 때문이다. 몰입하는 순간엔 인공적인 공간이라는 사실마저 잊는다.
소설이나 영화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만든 서사에 빠젼든다. 이처럼 사람들이 '현실을 잊고 잘 묘사된 세계에 빠져들 때'에 주목한 작가가 있다. 미국 디트로이트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헤르난 바스(Hernan Bas, 1978~)다.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놀이공원처럼 헤르난 바스의 세계는 눈을 떼기 어려울 만큼 다채롭고 독특한 요소가 가득하다. 루벨 패밀리는 바스의 작품만 38점을 수집했다. 이들은 뚜렷한 색이 있는 작품만 수집하기로 알려진 데다가 미술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메가 컬렉터인데, 대체 어떤 점에 매료된 것일까?
① 뉴욕 휘트니 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에 소장. / 헤르난 바스, 'Right Place Wrong Time’(2004), ©whitney.org
② 지난 2021년 3월, 필립스 뉴욕 경매 ‘New Now’에서 추정가의 4배가 넘는 USD 352,800에 판매되는 기록을 세운 작품. / 헤르난 바스, ‘Downhill at Dusk(The Runaway)’(2008), ©mutualart
헤르난 바스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존재는 '소년'이다. 성장이 모두 끝난 것도, 그렇다고 아주 어리지만도 않은 모습이다. 과도기적 시기에 놓인 소년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소년은 모델처럼 서 있다가도 우울함에 빠진 것 같기도 하다. 땅으로 떨군 시선이나 곧지 않은 자세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초기작에선 화려한 풍경이 작게 그려진 인물을 압도한다. 인물은 다채롭고도 길 없는 세계 속에서 어디로 가야할 지 방향성을 잃은 것 같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인물을 찾기 어려운 작품도 있다. 그러나 소년은 이렇듯 불안정 속에만 머무르진 않는다.
① 헤르난 바스, 'The start of the end of the longest drought'(2020), ⓒLehmann Maupin
② 헤르난 바스, 'How best to suffer swamp life at dusk'(2020), ⓒcreature comforts
2010년대 이후에 제작한 최근작에 가까워 질수록 소년은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구석에 있다가도 화면 전면으로 나오며 한 작품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커진다. 소년들은 더이상 큰 배경에 압도되지 않는다. 현실에 없는 비현실 속에 있어도 동요하지 않는다. 나와는 관련 없다는 듯 일관된 표정을 짓는다. 바스는 작품에 소년을 등장시키는 이유로 '젊어지고 싶은 욕망을 담는 건 아니다'라고 말한다. 오히려 같이 성장하는 존재로 여긴다고.
작품에 등장하는 소년들은 나와 함께 성장하고 있다. - 헤르난 바스
① 헤르난 바스, 'The Glofish Enthusiast'(2019), ⓒlonglistshort
② 헤르난 바스, 'A Moment Eclipsed'(2019), ⓒlonglistshort
보는 이들은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헤르난 바스가 그리는 풍경은 현실인가 싶다가도 몽환적인 꿈결 같다. 수족관이나 정원, 부둣가처럼 실재하는 장소나 폭우, 숲, 밀림, 동물 등 자연물이나 자연 현상을 그린 것 같지만 인위적이다. 표현 기법도 그렇다. 다채로운 색채와 강조된 윤곽선에 매트한 질감을 얹어 인공적인 느낌을 더한다.
이러한 풍경을 그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작가의 어린 시절이 있다. 쿠바에서 미국까지 배를 타고 이민 온 부모의 이야기를 신화처럼 접한 데다가 유령, UFO 등 으스스한 목격담이 잦은 마을에서 자랐다. 종교적 이야기, 오컬트적 코드Occult, 미신이나 주술 등 영적 현상을 유사 학문, 초자연적 현상 등 환상적인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마치 스코틀랜드 네스호에 산다는 정체불명의 생물처럼 말이다.
펜데믹 시기를 거치며 우울과 두려움을 겪은 바스는 이전과는 달리 핏빛 색감이 가득한 작품을 공개하기도 했다.
2021년 11월 소더비 뉴욕 경매에서 USD 746,000(약 8억 9천만 원)에 거래된 헤르난 바스의 'Night Flight or Midnight Migration or My Mery Way'(2008), ⓒSotheby's
헤르난 바스의 작품에는 낭만주의에서 추구했던 요소가 숨어 있다. 홀로 선 인물은 축소되어 있고, 풍경은 광활하다.
① 광활한 대자연 앞에 있는 인물에게서 고독, 적막, 외로움 등이 나타난 작품.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Waderer above the Sea of Fog)'(19세기), ⓒsubastack
② 여행을 다니며 웅장하고 극적인 자연과 기후를 겪으며 이를 작품으로 남겼다. 미국 풍경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가. 낭만주의 풍경화를 대표하는 '토마스 콜'의 'The Voyage of Life: Childhood'(1842), ⓒsotheby's
기묘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문학사나 미술사에서 한 획을 그었던 거장들 역시 바스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바스는 시대를 가리지 않고 고전 문학을 읽고 미술 서적을 사 모은다. 특히 '19세기 탐미주의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은 여러 번 읽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 외에도 샤를 보들레르, 장 드 뷔페, 잭슨 폴록, 에곤 실레, 다비드 프리드리히 등을 꾸준히 언급했다.
① '드 쿠닝의 햄튼 작업실'이라는 부제에서 드러나듯 미국 추상표현주의 작가 윌렘 드 쿠닝을 오마주한 작품이다. 바스는 거장을 찬미함과 동시에 질투를 느껴 작업실 창문을 새총으로 깨는 상상을 하며 그렸다고. 아무리 파괴해도 드 쿠닝을 '쫓아갈 수 없는 감정까지' 담았다. / 헤르난 바스, 'David & Goliath-de Kooning's studio, East Hampton NY'(2012), ⓒPKM Gallery
② 윌렘 드 쿠닝, 'Police Gazette'(1955), ⓒwillem-de-kooning.org
거장들의 작품을 섞어 보면서 그들에 관한 동경을 표현하고 나만의 스타일로 결과물을 만드는 것을 즐긴다. - 헤르난 바스
① 헤르난 바스가 인스타그램(@hernanbas)으로 공개한 작품. 'after my favorite Picasso'라고 언급했을 만큼 피카소에 관한 애정을 드러냈다. / 'Night Fishing Somewhere in France'(2021) 중 일부. ⓒHernan Bas
② 파블로 피카소, 'Night Fishing at Antibes'(1939), ⓒirequireart
미국 고전 시인이자 자연주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숲속에서 살며 간소한 생활을 담은 수필집 '월든'에서 영감받은 작품. 주제는 오두막과 소년. / 헤르난 바스, 'The Thought Flow(Cabin at Walden)'(2009), ⓒBAZAAR
20세기 미국 문학의 혁명,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영감받은 작품. 거대한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다 뼈만 남은 잔해를 끌고 오는 늙은 어부의 이야기. 실제로 헤밍웨이가 쿠바의 수도 근처에서 청새치 낚시를 하며 구상했다. 원작과 달리 헤르난 바스는 자신의 시그니처인 소년을 그렸다. / 헤르난 바스, 'The Young Man & the Sea'(2020), ⓒLehmann Maupin
*표지 : 헤르난 바스, 'A brief suspension of disbelief (amusement park jungle cruise)'(2012), ©PKM Gallery
글 | 원윤지
※ 누적 회원 13만 명을 보유한 아트테크 플랫폼 T사 앱 매거진과 블로그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게재본과 일부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