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Puccini(1858~1924, 이탈리아 루카)
우리는 왜 늘 지나간 뒤에야 알게 되는 걸까 악역이 하나도 없는 이야기인데도 이 오페라는 이상할 만큼 마음을 깊이 건드린다. 누군가의 배신도 없고, 극적인 갈등도 없다. 그럼에도 《라 보엠》은 조용히 관객의 마음을 무너뜨린다. 순수하고 독소 없는 이야기여도 충분히 재미있고, 충분히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작품은 굳이 설명하지 않고 보여준다.
우리는 왜 늘 지나간 뒤에야 알게 되는 걸까. 가족이든 사랑이든 그때는 너무도 평범해서 특별하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하루들이 시간이 흐른 뒤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줄 몰랐던 순간들이 이따금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십여 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 그리고 지금 암을 앓고 계시는 아버지, 한때는 언제나 당당하고 호탕했던 분이었지만, 이제는 노년의 기력이 눈에 띄게 쇠해졌다. 두 동생은 결혼해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워킹맘이자 아내로 살아가고 있다. 자매 셋이 모이면 늘 쉴 새 없이 까르르~ 웃음이 끊이지 않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1년에 한두 번 얼굴 보기도 쉽지 않다.
부모님이 내게 남겨주신 최대의 유산은 음악과 여행일만큼 우리 가족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국내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참 많이 다녔다. 한여름, 다섯 식구가 아버지의 차에 올라타 설악산으로 가족 여행을 떠난 날이었다. 강원도 첩첩산골에 숨은 미천골에 자리한 펜션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밤이 되자 펜션 내 작은 스테이지에 올라 아버지 친구분 가족들을 관객 삼아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던 그 저녁..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 순간들이 그렇게 소중한 줄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너무 평범해서, 너무 당연해서 그저 흘려보냈다. 지금의 현실 속에서 그날들은 더 이상 곁에 머물러 있지 않다. 어머니는 이 세상에 안 계시고, 아버지 또한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동생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왜 늘 그 순간이 지나간 뒤에야 그 가치를 알아보는지. 딱 하루만 돌아가 보고 싶은 순간들은 생각보다 소박하다. 대단한 사건도 특별한 성취도 아니다. 그저 아무 일 없던 하루, 평범한 저녁, 웃음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던 풍경들이다. 그래서 가끔은 그 당연했던 일상이 몹시 그립다.
- 추운 방
- 꺼져가는 촛불
- 가벼운 농담
- 사소한 행복들
《라 보엠》은 바로 이런 순간들로 이루어진 이야기다. 자극과 배신, 과잉 감정으로 눈물을 끌어내는 요즘 이야기들과 달리 이 오페라는 어떤 악역도 어떤 독소도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우리 삶에 스쳐 지나간 이들 - 가족, 친구들, 사랑했던 연인 - 에 대한 마음만큼은 그때도, 지금도 진심이었을 것이다. 사랑은 분명 계속되고 있지만 삶이 늘 그것을 끝까지 허락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라 보엠의 비극은 사랑이 무너진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 버린 데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작품을 단순한 사랑 이야기로만 다루기엔 아쉬움이 있다.《라 보엠》은 시간을 견디지 못한 젊음에 대한 기록이다. 지나가 버린 날들에 대한 애도이자 다시는 붙잡을 수 없는 순간들에 대한 조용한 고백이다. 흘러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해도 과거는 바꿀 수 없다. 다만 '오늘이 바로 우리 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라고 하듯 더 나이가 들어 같은 후회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극히 평범한 하루를 조금 더 조심스럽게, 조금 더 사랑하며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페라 라 보엠 La Bohème
전 4막
원작 앙리 뮈르제 Henry Murger의 〈보헤미안의 삶의 장면들 Scenes de la de Boheme〉
배경 1830년 경의 파리
등장인물
미미 Mimi(소프라노) 수를 놓아 생활하고 있는 가난한 여인
로돌포 Rodolfo(테너) 시인
마르첼로 Marcello(바리톤) 화가
쇼나르 Schaunard(바리톤) 음악가
콜리네 Colline(베이스) 철학자
대본 이탈리아어, 루이지 일리카&주제페 자코자
작곡 1893~1896
초연 1896년 2월 1일 토리노 왕립 오페라 극장
베리즈모 오페라 Verismo Opera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소재는 누구나 한 번쯤 지나온 가난하고 불안했던 젊은 시절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환기시킨다. 현실을 이상화하던 낭만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는 플로베르, 에밀 졸라, 모파상 등을 중심으로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문학이 확산되었고, 이는 문학을 넘어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세기 후반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Carmen》이 등장하며 이 작품은 이후 이탈리아 음악계에 적지 않은 자극을 주었다. 그 결과 1890년대 이탈리아에서는 베리즈모 오페라라 불리는 새로운 경향이 본격적으로 형성된다. 베리즈모 오페라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폭력, 가난, 욕망 같은 거친 현실을 미화 없이 무대 위에 옮기는 데 주력했다. 《라 보엠 La Bohème》또한 이상화된 영웅이나 신화적 인물이 아닌 현실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러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 음악적으로도 베리즈모 오페라는 전통적인 아리아의 반복이나 후렴을 최소화하고, 극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음악과 드라마를 밀착시키는 방식을 특징으로 한다.
나는 1류 작곡가는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고의 2류 작곡가이다.
- Giacomo Puccini -
시놉시스
#제1막 크리스마스이브, 파리 라탱 지구의 허름한 다락방에서 시인 로돌포와 화가 마르첼로, 철학자 콜리네, 음악가 쇼나르는 가난한 공동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땔감조차 없어 원고를 불태우며 추위를 견디던 중, 뜻밖에도 쇼나르가 돈과 음식, 술을 마련해 돌아온다. 네 친구는 잠시 가난을 잊고 크리스마스의 들뜬 분위기를 즐긴다. 집주인 브누아가 밀린 집세를 받으러 들이닥치지만, 이들은 술로 그를 취하게 만든 뒤 그의 외도를 문제 삼아 도덕적 분노를 가장하며 내쫓는 데 성공한다. 친구들은 함께 카페 모뮈스로 향하고, 로돌포는 원고를 마무리하기 위해 혼자 남는다. 그때 옆집에 사는 여인 미미가 꺼진 촛불에 불을 빌리러 찾아온다. 긴장과 허약함 속에 미미는 잠시 쓰러지고, 로돌포는 그녀의 창백한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다. 다시 촛불을 밝히려는 순간 열쇠를 잃어버린 미미와 로돌포는 어둠 속에서 함께 열쇠를 찾다 손을 맞잡게 된다. 로돌포는 자신이 시인임을 미미는 꽃을 수놓으며 살아가는 소박한 삶을 고백한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강하게 끌리며 사랑의 감정을 깨닫고 친구들이 기다리는 카페로 함께 향한다.
#제2막 크리스마스이브의 밤, 카페 모뮈스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축제의 열기로 가득 차 있다. 로돌포는 미미에게 분홍색 모자를 사주고 두 사람은 친구들과 함께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그때 마르첼로의 옛 연인 무제타가 돈 많은 노신사 알친도르와 함께 등장한다. 무제타는 무관심한 척 자신을 외면하는 마르첼로의 시선을 끌기 위해 일부러 화려하고 도발적인 태도를 보이며 노래하고, 이는 곧 마르첼로의 질투심을 자극한다. 결국 마르첼로는 무제타에 대한 감정을 다시 드러내고, 무제타 역시 그의 사랑을 확인한다. 무제타는 알친도르를 구두 수선을 핑계로 밖으로 내보낸 뒤, 친구들과 함께 그가 주문한 음식과 술을 즐긴다. 계산은 모두 알친도르에게 떠넘긴 채 일행은 군악대가 지나가는 거리로 흥겹게 사라진다.
#제3막 이듬해 2월, 파리 남쪽 세관 문 근처의 여관 앞. 눈 내리는 새벽, 미미는 마르첼로를 찾아와 로돌포와의 관계에 대해 고민을 털어놓는다. 로돌포의 지나친 질투와 의심 때문에 더는 함께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미미는 여관 안에 있는 로돌포를 피해 밖에 남고 곧 로돌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마르첼로에게 미미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두려워 일부러 그녀를 밀어내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를 엿듣던 미미는 결국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두 사람은 슬픔 속에서 이별을 나눈다. 그러나 완전한 결별을 미루고, 봄이 올 때까지는 함께하기로 한다. 한편 여관 안에서는 무제타의 또 다른 남자 문제로 마르첼로와 무제타가 격렬히 다투고, 두 사람 역시 상처를 남긴 채 헤어진다. 두 쌍의 연인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랑의 균열을 맞이한다.
#제4막 몇 달이 지난 뒤, 무대는 다시 파리 라탱 지구의 다락방으로 돌아온다. 로돌포는 시를 쓰고, 마르첼로는 그림을 그리지만 두 사람 모두 떠나간 연인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콜리네와 쇼나르가 초라한 음식과 술을 들고 돌아오고, 네 친구는 일부러 농담과 장난으로 가난과 상실을 잊으려 애쓴다. 그때 무제타가 나타나 미미가 병세가 악화된 채 밖에 있으며 로돌포 곁에서 죽고 싶어 한다고 전한다. 미미는 다락방으로 옮겨져 자리에 눕고, 친구들은 가난 속에서도 각자 가진 것을 내어 약과 온정을 마련하려 한다. 무제타는 자신의 장신구를 내놓고, 콜리네는 애착을 담아 입어 온 낡은 외투를 전당포에 맡기러 나선다. 모두가 자리를 비운 사이 로돌포와 미미는 처음 만났던 순간과 행복했던 지난날을 조용히 떠올린다. 미미는 마지막 힘을 다해 선물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이내 조용히 숨을 거둔다. 돌아온 친구들은 그녀의 죽음을 알아차리고 침묵에 잠기며 로돌포는 끝내 미미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