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Il Trovatore」

G. Verdi(1813-1901, 이탈리아)

by 세실리아

'아레나 디 베로나 Arena di Verona' 오페라 페스티벌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야외 오페라 축제 가운데 하나다. 고대 로마의 유산인 원형극장에서 매년 여름 개최되며, 1913년 베르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아이다 Aida》 공연으로 시작되어 한 세기 넘는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공연은 해 질 녘 시작된다. 관객들은 돌로 된 계단석에 앉아 공연을 기다린다. 최대 수만 명까지 수용 가능한 극장 내에는 막이 오르기 전 촛불을 켜는 전통이 있다. 거대한 원형극장이 어둠 속에서 은은한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광경을 바라보는 것 또한 이 축제를 즐기는 묘미이다. 유학시절, 나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일 트로바토레 Il Trovator》를 만났다. 수천 명이 모인 야외극장에 울려 퍼지던 소프라노의 음성. 무대에서 제일 먼 자리였지만, 그 소리는 공기를 가르며 다가와 정확히 내 명치까지 파고들었다. 한여름 밤, 성벽 너머에서 불어오던 파스타와 와인의 향. 그 향기와 음악이 뒤섞인 공기 속에서 나는 문득 이런 속삭임을 들은 듯하다. "Que sera sera 께 세라 세라, 너무 힘주어 살지 마. 인생은 그저 즐기기 위해 던져진 축제 같은 거야"

유학시절, 그리운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뿌삐야, 내 청춘을 돌리도~~~~~ 흐엉ㅜㅜ"

《일 트로바토레 Il Trovator》는 베르디의 작품 중에서도 음악적 밀도와 완성도가 특히 돋보이는 걸작이다. 줄거리를 모른채 감상하더라도 극적인 선율과 성악가들의 기량이 빚어내는 벨 칸토 Bel canto의 정수는 청중을 단숨에 음악 속으로 끌어들인다. 물론 이야기 자체는 복잡하고 과장되어 보인다. 누군가는 개연성이 부족한 서사에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페라의 본질은 결국 음악에 있다. 음악학자 조셉 커먼 Joseph Kerman(1924~2014)의 말처럼, 오페라의 메시지는 줄거리가 아닌 음악에 의해 완성된다. 음악은 대본을 해석하고 때로는 변형하며, 언어와 연출을 넘어서는 의미를 만들어 낸다. 이 작품에서도 극적 장치는 음악 안에서 비로소 설득력을 얻는다.


작품 배경

원작 안토니오 가르시아 구티에레스 Antonio García Gutiérrez의 희곡 『음유 시인』

대본 살바토레 카마라노 Salvatore Cammarano, 에마누엘레 바르다레 Leone Emanuele Bardare

초연 1853년 1월 19일, Roma Teatro Apollo

배경 1409년 내전 중, 스페인의 비스카야 지방과 아라곤 지방

《일 트로바토레》는 제목 그대로 과거 '음유시인 Il Trovatore'의 존재에 뿌리를 둔다. 중세의 전장을 오가며 시를 짓고 류트를 연주하던 이들은, 사랑과 명예를 노래하는 예술가인 동시에 칼을 든 기사였다. 유럽 각지에서 트루바두르, 민네징어로 불리던 이들은 19세기 낭만주의자들에게는 더없이 매혹적인 소재였다. 베르디가 무대 위에 펼쳐 보인 중세시대 또한 그러한 상상력 속에서 재구성된 세계다. 정교한 역사적 사실보다 격렬한 복수, 뒤틀린 혈연,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전면에 놓이는 어두운 공간이다. 주인공 만리코는 이 모순된 세계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전사이면서도 밤이면 연인의 창가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낭만적인 음유시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단순히 기사의 무용담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그 이면에 흐르는 '집시의 저주' 때문이다. 화형당한 어머니에 대한 복수 그리고 뒤엉킨 모성의 비밀은 만리코의 노래를 더 이상 낭만적인 서사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베르디는 음유시인의 선율을 빌려 인간을 집어삼키는 운명의 허망함과 그 속에서도 타오르는 본능적인 열정을, 음악이라는 가장 세련된 언어로 차갑게 비춰낸다.

중세 음유시인

중세 기사 출신의 음유시인들은 단순한 풍류객을 넘어 '세속 음악'의 기틀을 마련한 핵심 주역으로, 성가 위주의 종교음악이 지배하던 중세에 사랑·정치·전쟁 등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과 삶을 다룬 단성 세속음악을 구축했다. 말하자면, 이들은 스스로 시를 짓고 선율을 붙여 연주하는 '싱어송라이터'의 원조라고 할 수 있으며 문학적 서사와 음악적 리듬을 결합해 궁정의 사랑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남프랑스의 트루바두르, 북프랑스의 트루베르, 독일의 민네징어로 이어지며 유럽 각지의 고유한 언어와 감수성을 담은 음악적 전통을 구축했다.

- 트루바두르 Troubadour: 11–13세기 프랑스 남부에서 활동하며 사랑과 기사도를 노래했던 시인·작곡가

- 트루베르 Trouvère: 12–14세기 프랑스 북부에서 활동한 음유시인으로, 트루바두르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음유시인

- 민네징어 Minnesänger: 12–14세기 독일어권에서 '민네(Minne, 궁정적 사랑)'를 주제로 노래한 기사 및 귀족계급 중심의 서정 시인·가수

- 마이스터징어 Meistersinger: 15–16세기 독일의 수공업자(시민계급)이 길드를 형성해 조직적으로 활동하며 엄격한 작시·작곡 규칙에 따라 종교적·도덕적 내용을 노래한 장인들

등장인물

만리코 Manrico - 음유시인이자 장교 / Tenor

레오노라 Leonora - 궁정 귀부인 / Soprano

루나 백작 Count di Luna - 레오노라를 연모하는 귀족 / Baritone

아주체나 Azucena - 집시 여인 / M. Soprano

페란도 Ferrando - 루나의 부관 / Bass

이네스 Ines - 레오노라의 친구 / Soprano

루이즈 Ruiz - 만리코의 부하 / Tenor

줄거리

#제1막 결투

아라곤의 궁정. 루나 백작은 밤마다 레오노라의 창 아래를 서성인다. 그녀를 향한 집착은 이미 사랑의 경계를 넘었다. 병사들을 지키는 페란도는 15년 전의 음산한 사건을 이야기한다. 마녀로 몰려 화형당한 한 노파 그리고 그 직후 사라진 백작의 어린 동생. 잿더미 속에서 발견된 유골은 복수의 징표로 받아들여졌다. 노파의 딸이 아이를 불길 속에 던졌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녀는 끝내 붙잡히지 않았다. 한편 레오노라는 정원에서 이네스에게 고백한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음유시인이자 기사인 남자를 보고 사랑에 빠졌다고. 밤마다 들려오는 류트의 선율은 그 사람의 것이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노래를 따라 달려 나가지만, 순간 루나백작을 만리코로 착각한다. 이윽고 진짜 음유시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반란군을 이끄는 만리코다. 질투와 정치적 적대가 뒤엉키며 두 남자는 결투를 향해 나아간다.

#제2막 집시

비스카야의 산악 지대, 집시들의 모루 소리와 노랫가락이 울린다. 아주체나는 어머니가 화형당하던 날을 떠올린다. 복수를 위해 백작의 아들을 납치했으나, 광기 속에서 제 아이를 불길에 던지고 말았다는 고백. 그 기억은 그녀를 좀먹는다. 만리코는 자신이 누구인지 묻지만, 아주체나는 모호하게 답한다. 중요한 것은 혈육이 아니라 자신이 쏟아온 모성의 시간이라며. 한 전령이 레오노라가 만리코의 전사를 믿고, 수도원에 들어가려 한다는 소식을 전한다. 부상에서 막 회복한 만리코는 만류를 뿌리치고 길을 나선다. 수도원 앞에서 루나백작의 납치 시도는 실패하고, 연인은 다시 함께 도망친다.

Il Trovatore 中 'Stride la vampa' _Azucena’s aria / Anita Rachvelishvili

#제3막 집시의 아들

카스텔로르 요새 앞. 루나는 만리코가 지휘하는 성을 포위한다. 근처에서 붙잡힌 아주체나는 페란도에 의해 과거의 범인으로 지목된다. 그녀가 만리코의 어머니임을 알게 된 루나백작은 복수와 질투를 한꺼번에 실행할 기회를 붙든다. 화형대를 준비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요새 안에서 만리코와 레오노라는 결혼을 준비한다. 그러나 아주체나가 붙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만리코는 사랑보다 앞서는 것이 어머니에 대한 의무라 여기며 망설임 없이 군사를 이끌고 나선다.

#제4막 처형

전투는 실패로 끝난다. 만리코와 아주체나는 포로가 되어 탑에 갇힌다.아주체나는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새벽이면 처형이 집행될 예정이다. 레오노라는 몰래 성으로 들어와 루나백작에게 만리코의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그는 대가로 그녀를 요구하고, 레오노라는 겉으로 이를 받아들이지만 몰래 준비한 독약을 삼킨다. 감옥에서 만리코는 불을 두려워하는 아주체나를 달랜다. 레오노라는 그에게 자유를 알리지만, 그는 그녀가 치른 대가를 직감하고 분노한다. 이내 그녀가 독약으로 쓰러지며 진실이 드러난다. 루나백작은 배신당했다는 격분 속에 즉각 처형을 명한다. 아주체나는 "그가 너의 동생이다! 드디어 복수를 했다"고 외치며 쓰러진다.

⊙ 이것만 알고 감상해요 ☞

벨 칸토 Bel canto: 'bel(아름다운) + canto(노래)'라는 뜻의 이탈리아 가창법으로, 화려한 기교보다 고른 음색과 유연한 레가토 Legato를 중시하는 서양 성악의 정수를 말한다. 대표 작곡가로 로시니 G. Rossini, 벨리니 V. Bellini , 도니제티 G. Donizetti 등이 벨 칸토 시대를 풍미하며, 오페라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성악도가 대학원 음교과 입시 구술면접 때, "벨 칸토 Bel canto에 대해 설명해 보라"는 문제를 너무 황당하게 대답해서 면전에서 면접관한테 비웃음을 샀던 웃픈 기억이; 나는 여전히 벨 칸토 Bel canto의 개념이 혼란스럽다. 모든 아리아들이 다 그 자체로 'bel(아름다운) + canto(노래)' 같기에...}
매거진의 이전글오페라 「베르테르 Wert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