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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여름에는 낭만을

The volunteers - Summer

by 이윤주


여름은 정말 이상하다. 그런데 지나간 여름은 더더욱 이상하다. 거대한 불덩이처럼 이글거리는 태양을 피해 그늘로 숨어들어도 물먹은 공기는 끈질기게 온몸에 달라붙는다. 피부는 뜨겁다 못해 익어버릴 듯이 따갑고, 땀에 젖은 옷은 가뜩이나 무거운 몸을 더 무겁게 만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나간 여름은 그것마저 낭만으로 기억된다.



한여름의 바다만큼 낭만적인 풍경이 또 있을까. 방영한 지 어느덧 20년 가까이 된 시트콤<거침없이 하이킥>의 마지막 화에는 제주도에 간 민호와 범이가 바다에서 뛰어노는 장면이 나온다. 촬영 시기가 장마와 겹쳤던 걸까. 그날의 바다는 맑고 푸른 여름 바다가 아닌 잿빛 하늘 아래 빛바랜 바다였다. 떠나간 유미를 그리워하는 민호의 담담한 내레이션과 함께 빛바랜 바다를 닮은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 장면에 쓰인 노래는 Maximilian Hecker의 'Flower Four'인데 딱히 여름을 위해 만들어진 곡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이 장면 때문인지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 흐린 여름, 꿉꿉한 날씨, 잿빛 바다, 끝난 첫사랑, 바래가는 청춘 속에서 찬란하게 뛰어노는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Flower Four’는 1절과 2절의 가사가 같은 구조를 반복하는데, 이런 구성과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가 또 있다. 바로 The Volunteers의 ‘Summer’다. 이 노래도 푸른 여름이 아닌 어딘가 바래진 여름이 떠오른다. 아마 지난여름을 회상하는 듯 바래진 뮤직비디오 때문이겠지만, 그것을 차치하더라도 기타 리프와 백예린의 나른한 목소리는 언젠가의 여름으로 데려다준다. 그 여름의 나는 바닷물에 몸을 적시고, 누군가와 꺄르르 웃고, 곧 사라질 발자국을 만들며 뛰어놀고, 아무리 털어내도 털어지지 않는 집요한 모래에 결국 포기를 선언하고 투덜거리며 신발을 신던 나. 그래, 나에게도 그런 여름이 있었지, 아니, 있었나? 싶은 순간, 현실은 문득 선명해진다.



현실의 여름바다는 자비 없이 잔인하다. 도를 넘어선 성수기 특유의 바가지요금, 주차장과 화장실 앞에 길게 늘어선 줄,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오염되고 있는 바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각종 쓰레기들. 낭만은커녕 인류애가 사라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매일매일이 종말인 것처럼 뜨거운 불지옥, 장마 덕분에 매일 공짜로 체험하는 습식 사우나, 그리고 본체와는 다르게 자기주장이 강한 나의 반곱슬 머리만이 여름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런 여름을 견디기 위해 아주 작은 낭만이라도 찾아야 했다. 그렇게 찾은 작은 낭만은 뻔하게도 바로 에어컨과 아이스커피였다. 불지옥을 벗어나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진 카페에 앉아 마시는 아이스커피는 여름에만 누릴 수 있는 작은 사치이자 낭만이다. 에어컨과 아이스커피 말고도, 여름 속 작은 낭만은 곳곳에 숨어 있다. 보물찾기 하듯 하나씩 찾아내다 보면, 그 작은 낭만들이 현실의 여름을 견뎌내게 해주고, 언젠가는 아름답게 기억될 지난여름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But somehow we will realize

Someday we'll stand here by the sun.

Don't let me get away.

The Volunteers- Su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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