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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윤종신 May 02. 2018

우리 한남이

젊은 작가가 쓰는 한남동에 대한 짧은 픽션 - 한남동 이야기

우리집 고양이는 커다란 코리안숏헤어 노랑둥이로, 이름은 ‘한남이’다. 그 이유는 한남동에서 데려왔기 때문인데, 내가 한남이를 만난 3년 전 그 밤은 내 기억 속에서 꿈결 같은 신비한 분위기로 감싸여 있다.


나는 한남동에서 산 적이 없고, 그곳에 갈 일도 거의 없었다. 어릴 때, 즉 서울에 올라오기 전에는 ‘한남동’이라는 말을 들으면 부유한 작은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들은 둥글게 모여 앉아 그에 대해 말하면서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그놈이 그렇게 잘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하고 황당하고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그는 건설업체 사장으로, 한남동의 아파트에 산다고 했다. 나는 한강 변이 보이는 화려한 아파트를 상상했다. 그러나 마침내 한남동의 작은아버지 집에 방문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그곳은 한눈에 봐도 무척 오래된 자그마한 아파트 단지였다. 엘리베이터는 낡고 좁아서 네 명이 들어가자 꽉 찼다. 내부 역시 넓긴 했지만 아주 낡은 티가 났다. 서울의 아파트 시세에 무지했던 나는 부자가 왜 이런 오래된 아파트에 사는지 의아했지만, 어른들의 말로는 그 아파트가 재개발될 예정이며 위치 등을 고려했을 때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서울의 부자란 지방과 다르구나. 새로운 세상을 엿본 느낌이었다.


최근에는 한남동이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나도 모르게, ‘한국 남자’의 줄임말로 널리 쓰이고 있는 ‘한남’이 떠오른다. 그리고 남자를 너무 좋아한다는 이유로 별명이 ‘한남러버’가 된 나의 친구도 떠오른다. 친구는 한남동이라는 말만 들어도 너무 신이 난다고 한다.


또한 물론, 우리 한남이를 만난 그날 밤이 떠오른다. 그날 밤의 일은 마치 예전에 오래된 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이 저승길을 갈 때 그렇듯 연기가 자욱이 깔린 것처럼 비현실적인 영상으로 떠오른다. 별로 취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술에 취해 있었던 것 같다. 그날 나는 한남동에서 대학 시절 같이 모임을 했던 멤버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친구가 일찍 자리를 뜬 나머지 여자는 나 혼자였다. 2차에서 3차로 넘어가기 전, 우리는 잠시 비탈길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술집 위쪽의 좁은 골목으로 올라섰는데, 그 골목은 오르막이었고 한쪽에 계단이 있었다. 멤버들은 담배를 다 피운 뒤 골목에서 나타난 검정색 길고양이와 장난을 쳤다. 그때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양이 좋아하시나봐요?”
고개를 들어보니 비탈 위쪽에서 한 아주머니가 점퍼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서 있었다. 아주머니가 말했다. “우리집에 고양이 많은데. 고양이 구경하러 안 갈래요? 보고 맘에 들면 데려가.”
만취한 선배들은 좋다고 소리쳤다. “와아아 고양이 보러 가자!” “고고! 고고!”
나 또한 술에 취하긴 했지만,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 집에 따라가다니. 아줌마는 여전히 양쪽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약간 초조한 듯, 혹은 수줍어하는 듯 선배들 건너편으로 나를 흘끗 보며 말했다. “저 아가씨도 같이 가야 해. 아저씨들하고만 가긴 그렇잖아.”
선배들은 그 와중에도 어딜 봐서 아저씨냐며 항의했다.
“집이 어디신데요?” 내가 물었다.
“바로 저기야. 여기서 좀만 가면 돼. 가까워요.”
황당한 일이지만,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아주머니를 따라가고 있었다. 가장 나이 많은 선배가 앞장섰고, 그다음이 나, 뒤로 두 명이 따라왔다.
“장기 털리는 거 아냐?” 뒤에서 선배 둘이 흥겹게 속삭였다. 자기들끼리 대사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우리가 들어가면 박카스를 줄 거야.” “아주머니, 이거 뚜껑이 따져 있는데요?” “아, 그거 내가 마시기 편하라고 따놓은 거야. 쭉 마셔.”
나는 고개를 돌려 그들에게 핀잔을 주었다. “다 들려. 조용히 좀 해.”
우리는 네 명이나 되고, 설마 무슨 일이야 있을까. 하지만 취한 와중에도 지금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훗날 <그것이 알고 싶다>에 방송되는 장면이 떠올랐다. 우리 네 사람이 아주머니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가는 시시티비 영상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들은 왜 저항도 하지 않고 따라갔던 걸까요?

화려한 번화가에서 조금 올라갔을 뿐인데, 전혀 다른 풍경이 나왔다. 작은 빌라들이 다닥다닥 붙은 골목이었다. 그중 한곳으로 들어갔다. 좁은 부엌이 있고, 통로에 방이 두 개 있었다. 아주머니는 안쪽 방에 고양이가 있다고 했다. 우리는 신발을 벗고 샛노란 장판 위를 지나 방으로 들어갔다. 세로로 좁고 긴 방이었고, 왼쪽에 있는 이층 침대가 가구의 전부였다. 그리고, 정말로 고양이들이 있었다. 아주아주 많은 새끼고양이들이 일층 매트리스 위에, 둥근 방석처럼 한 덩어리로 뭉쳐 있다가 흩어지며 바글거렸다. 흩어진 고양이들은 바닥으로 내려왔다. 두세 마리는 침대 아래로 숨어들었지만 나머지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아무리 들어도 야옹야옹보다는 삐약삐약에 가까운 소리를 내면서 우리 다리를 붙잡고 기어오르려 했다.


“동네 고양이가 우리집에 들어와서 새끼를 낳았어. 일곱 마리나. 이걸 어떡해.” 아주머니가 말했다. 선배들은 꺅꺅 소리를 지르며 고양이를 한 마리씩 무릎에 올리고 쓰다듬었다. 그러다 조금씩 조용해지며, 하나둘 고양이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다들 술이 깨는 듯했다. 그들은 한마디씩 중얼거렸다. 진짜 귀엽긴 한데. 책임지는 건 장난이 아니겠지. 한 선배는 마지막까지 망설였지만 형은 집에 잘 들어가지도 않잖아! 하고 모두 말렸다. 아주머니는 점퍼의 양쪽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우리를 보고 있었다. 기대감으로 빛났던 아주머니의 얼굴은 점점 실망으로 바뀌었다.

그날 정작 고양이를 데리고 나온 사람은 나였다. 결국, 내가 가장 취했던 걸까. 아주머니는 빈 박카스(!) 상자에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담아 주었다. 선배들은 집까지 택시를 타고 가라고 돈을 모아주었다. 믿을 수 없게도 우리 한남이는 그때 박카스 상자에도 쏙 들어갈 만큼 작았다. 그렇게 나와 한남이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지금도 그날 밤을 떠올리면, 마치 꿈을 꾸었던 것만 같다. 이제 한남이가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아주머니, 고양이가 이렇게까지 커질 거라고는…… 저희 한남이의 부친 모친 모두 고양이가 맞는 거지요? 다들 너구리 아닌지 물어봐서요. 마지막으로, 제게 한남이를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김세희

1987년 목포 출생. 2015 민음사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작가이자 편집자이자 고양이 엄마.


*<한남동 이야기>는 젊은 작가가 쓰는 한남동에 대한 짧은 픽션입니다. 더 많은 <한남동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확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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