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작가가 쓰는 한남동에 대한 짧은 픽션 - 한남동 이야기
엄마의 친구는 소설가였다. 그녀는 한남동을 배경으로 단편소설 한 편을 썼는데, 대표작은 아니었다. 어제 그녀가 죽었다. 유방암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세 번의 수술을 받았고, 최근에는 항암 치료 없이 주위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다. 인터넷 기사에 그렇게 나와 있었다. 그녀가 유방암에 걸린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첫 수술 후, 엄마가 그녀에게 문병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이십 년 전 일이다. 병원에서 돌아오자마자 거의 일 년 만에 엄마의 우울증이 재발했는데, 그녀의 수술 결과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엄마는 열심히 병원에 다니고, 어떻게든 의욕을 긁어모아 일상을 안정된 궤도로 돌려놨다. 그 사이 그녀도 항암 치료를 성실하게 받았다. 엄마보다 시간이 훨씬 더 걸렸지만, 완치 판정을 받았고 두 분은 함께 일본 가고시마 여행을 다녀왔다. 이후 그녀가 수술을 두 번 더 받은 일은 몰랐다. 아마 최근 삼 년 이내에 재발했을 거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때, 엄마가 돌아가셨으니까. 내게 그녀의 근황을 전해줄 사람이 사라졌던 것이다.
한남동을 배경으로 한 그 소설의 제목은 「손」이다. 「손」에는 시집살이에 시달리는 도시 출신 여자가 나온다. 소설 끝에 그녀는 모든 인연을 끊고 집을 나와 한남동의 작은 방안에 혼자 틀어박힌다. 언제나 자신이 갈망했던, 혼자만의 공간 속에서 마음껏 지루해한다. 지루해질 때마다, 여자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낀다. 행복해한다. 나는 그 소설을 여러 번 읽었는데, 어떤 장면과 대사들 때문이었다. 그런 장면이 나온다. 시달림에 지친 여자가 설거지하다 갑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음식 찌꺼기가 묻은 지저분한 접시를 싱크대에 그대로 내버려둔 채.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잠을 자기 시작한다. 시어머니가 아무리 깨우고 심지어 욕을 해도 여자는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의 손을 꽉 맞잡은 채, 깊이 잠들어 있을 뿐이다.
엄마가 그랬다. 자주 그랬다. 설거지하다가, 청소하다가, 엄마는 방으로 들어가버리곤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장면이 익숙했다. 엄마가 방으로 들어가면, 그 순간이 다시 왔다는 것을. 엄마가 잠에서 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걸 그냥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레 알고 있었다. 나는 「손」을 읽으며 계속 엄마를 기억했다. 그러나 나는 그 내용 전부가 엄마의 이야기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다른 설정들은 엄마와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가부장적인 시골에 처박힌 여자와 달리, 엄마는 평생 소도시에서 살았다. 할머니와의 관계도 나름 좋은 편이었다. 빚에 시달려서 어쩔 수 없이 시골에 내려간 여자와 달리, 엄마는 의대를 졸업하자마자 아빠와 함께 부부 소아과를 개업했다. 부모님은 사이가 좋았다. 문제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는 나름대로 화목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손」을 계속 읽었다.
엄마의 병명은 정확히 말하면 산후우울증이었다.
누군가와 오십 년간 친구로 지낸다는 건 뭘까. 그건, 어떤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할까.
엄마는 다정했다. 똑똑한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삶에는 어떤 구멍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평생 고생했다. 엄마는 가족에게 솔직해지라는 정신과 의사의 권유를 듣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와 내게 진심을 털어놓은 적이 없다. 오늘 기분이 어떤지. 이런 기분이 들 때는 어떤 마음인지. 괴로운지 슬픈지. 엄마는 모든 걸 혼자 삭혔고, 혼자 노력해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방으로 들어갔고, 다시 나왔다. 평생 그걸 반복했다. 본인이 의사였고, 그래서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은 치료법인지 알면서도 그랬다. 누군가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엄마에게는 더 힘든 일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엄마를 이렇게 이해했다. 그런데, 「손」을 읽고 난 후에는 다른 생각을 했다.
어쩌면 엄마는 나와 아빠에게 하지 않은 말을, 친구에게는 했던 것이 아닐까. 「손」에 서술된 모든 마음은 사실, 엄마의 진심이 아닐까. 결혼은 후회로 가득하고, 아이를 낳고 싶었던 적도 없고, 아이를 사랑한다는 느낌도 들지 않고, 모든 것에서 벗어나 오직 혼자 살아가는 것만이 진짜 원하는 것이라는, 바로 그 마음.
나를 임신했을 때 엄마는 스물다섯 살이었고, 학생이었다. 결혼 후 엄마는 전문의 시험을 보지 않았다. 아빠와 함께 병원을 꾸려나가다가, 마흔 넘어서는 진료도 그만뒀다. 그러니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엄마의 마음에 동그란 구멍을 뚫은 사람은 다름 아닌 내가 아닐까. 사춘기 무렵 어느 날, 나는 견딜 수가 없었고 엄마에게 진심을 털어놓으며 항의했다. 엄마는 내게 편지를 썼다. 스무 살 봄, 아빠를 만나던 순간부터 엄마는 항상 나를 원했고, 그 바람이 이루어졌을 때 누구보다 행복했다고. 편지를 건네던 엄마의 손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왜 그런 것 따위가 눈에 띄는지 짜증이 나서 울어버렸다. 왜 엄마의 손에는 그렇게 주름이 가득한지, 분해서 눈물이 났다. 그날은 그랬다. 그리고 나는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손」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그런 적이 없어’ 라고 말해왔기 때문에, 긴 세월 동안 그 마음이 정말로 내 진심이라고 느끼며 살았다.”
그런데 왜 한남동일까? 내가 알기로 그녀는 한남동에 산 적이 없다. 엄마도 한남동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다만, 소설에 그런 대목은 나온다. 여자가 가고 싶은 동네를 종이에 하나씩 적어 창밖으로 던진다. 가장 멀리 떨어진 종이를 주워 펼쳐보니 한남동이라고 적혀 있었다.
엄마도 그렇게 종이를 날렸을까. 그래놓고 그냥, 내게 말하지 않았던 걸까.
「손」에는 반전이 없다. 알고 보니 아이만은 사랑했다는 깨달음을 얻거나, 그래도 누군가를 곁에 둬야겠다고 다짐하거나, 우는 장면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여자는 혼자 행복하다.
엄마의 친구는 결혼하지 않았다. 장편소설 다섯 권과 단편소설집 네 권을 냈다. 그리고 최근, 그러니까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투병일기』라는 것을 펴냈다. 나는 그녀의 소설은 모두 찾아 읽었지만, 그 책은 아직 읽지 않았다.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결국 그 책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다. 어제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오늘 나는 광고로 소개된 그 책의 서문을 읽었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병에 걸린다는 건, 타인에게 내 행복을 맡겨둔 것과 같다. 살아 있는 순간에 감사하고 모든 것이 소중해지는 순간에도, 통증은 불현듯 찾아온다. 변덕스러운 사랑처럼. 그러면 나는 무너진다. 내 의지가 아니라는 것. 내 선택과 잘못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의 유약한 마음에 내 인생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난다. 왜 하필 나야? 억울하고 분할 때마다 나는 글을 썼다. 내가 작가여서가 아니다. 내 친구에게 배운 방법이다. 친구는 괴로울 때마다 마음을 기록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자신만의 마음을 간직했다는 생각 덕분에 견딜 만해진다고 했다. 누구에게도 맡겨놓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니까. 그렇게 평안을 찾고 난 후,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향해 돌아가곤 했다. 천천히,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내가 과연 이 책을 읽게 될지, 잘 모르겠다.
1986년 전주 출생. 2012 경향신문 신춘문예 「방」으로 등단. 소설집 『괜찮은 사람』이 있다. 내 직업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