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월간 윤종신 May 28. 2018

우주의 바람, 멈추지 않을 – Spitz

나는 금세 사랑에 빠진다. 오랫동안 부정해보려 했지만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조금은 자존심 상하는 내 타고난 천성이다. 나는 정말이지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다. 내가 이런 고백을 하면 사람들은 흔히 ‘너는 쉽게 사랑에 빠지는구나?’ 되묻는다. 천만의 말씀. ‘쉽게’의 용례가 틀렸다.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사랑에 빠지지만 아무나 사랑하지는 않는다. 아니, 사랑할 수 없다는 게 맞다. 마음이 그 사람을, 그 음악을, 그 장소를, 그 순간을 온전히 납득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쉽게도 사랑도 없다. 물론 그 단계만 무사히 거치면 나머지는 너무나도 쉽고 빠르다. ‘금사빠’ 치고는 꽤나 까다로운 금사빠인 셈이다.

ロビンソン(1995), Spitz

밴드 스피츠와 나 사이에도 역시 그런 몇 가지 확인 단계가 필요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겉보기 등급은 무척 평범하지만, 음악 좀 듣는다는 애들 사이에선 알음알음 소문이 나 있는 나름 알려진 ‘음악 오타쿠’ 중 하나였다. 주 종목은 가요와 흑인 음악. 친구들 사이 한참 유행하던 댄스 가요는 당시만 해도 그리 친하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저녁을 먹고 난 야자시간에도 교실 구석에서 CDP를 끌어안고 반쯤 자다 깨다를 반복하던 나에게 어느 날 누군가 불쑥 낯선 CD 하나를 내밀었다. 인디 음악과 제이팝에 능통한 걸로 유명한 옆 반 친구였다. “너 이거 들어봤어? 좋아할 거 같아서”. 일본의 4인조 밴드 스피츠와의 첫 만남이었다.


사실 스피츠의 첫인상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일본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함 그러나 그 안에 숨어있는 반짝임 같은 것들로 사랑받는 밴드였고 나는 한창 자극적인 것에 익숙한 나이 10대였다. 처음 듣는 일본어 발음과 발성도 낯설었고, 무엇보다 흑인음악의 묵직한 리듬과 사운드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는 앨범 안의 모든 게 너무 수수하기만 했다.


한 번 듣고는 사물함에 던져 놓은 뒤 얼마가 지났을까, 예고도 없이 ‘금세’의 순간이 찾아왔다. 늘 듣던 음악이 지겨워 뭐 새로운 것 없나 온 사물함과 교실을 부술 기세로 뒤적거리던 나에게 순간 초록 이파리와 빨간 원피스를 입은 소녀, 어쿠스틱 기타가 놓인 앨범 커버가 눈에 띄었다. 아, 스피츠.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둘만의 세계 너의 손을 놓지 않을 거야 / 커다란 힘으로 하늘로 떠오르면 루라라 우주의 바람을 타네’(‘로빈슨’(1995)) 나는 이 한 없이 순박한 시골 소년 혹은 분교 선생님 같은 밴드에 몸과 마음을 모두 줘버리고 만 것이다.


스피츠를 만난 이후 나는 그제서야 한국과 해외의 록 음악을 조금씩 찾아 듣기 시작했다. 일본어를 알기는커녕 검은 건 글씨고 흰 건 종이인 상태로 각종 일본 웹사이트를 뒤지며 밴드의 비공개/라이브 음원을 긁어모았다. 성인이 된 후 처음 떠난 해외여행은 당연히 일본에서 열리는 스피츠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고, 몇 년 뒤에는 일본으로 유학도 떠났다. 이유는 단 하나, 스피츠의 모든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보컬 쿠사노 마사무네가 쓴 노랫말을 나의 눈과 귀로 직접 읽고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몇 곡의 노래가 일본 음악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아름다운 노랫말을 쓰는 그의 노래가 그리는 세상의 풍경은 처음 만난 그때도 지금도 참 한결같이 풋풋하고 푸르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스피츠는 나의 인생 한가운데 말뚝을 받은 채 특유의 수수한 카리스마를 뽐내고 있다. 온통 빠르고 가파른 일상 속 가끔 잊고 살기도 하지만 1986년 첫 만남, 1991년 정식 데뷔 이후 멤버 교체 없이 꼬박 30년 가까운 세월을 노래하고 있는 이들이기에 초조하지 않았다. 20대였던 멤버들은 이제 아슬아슬한 50대가, 10대였던 나는 이제 꽉 찬 30대가 되었지만 스피츠의 음악이 주는 울림은 놀라울 정도로 그대로다. 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는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이들의 노래는 여전히 텅 빈 복도와 교실을 사려 깊은 멜로디와 조심스러운 감정으로 가득 채운다. “너와 다시 한 번 만나기 위해 만든 노래야 / 오늘도 노래해 녹슨 항구에서”(‘항구’(2016)) 이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안다. 언제나 돌아보면 그 자리에 있어 줄 든든한 음악이 있다는 것, 참 행복한 일이다.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