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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윤종신 Apr 01. 2018

‘피해자 다운 피해자’ 같은 건 없다

‘피해자다운 태도’를 강요하기 시작하면 어떤 지옥이 펼쳐질까?

“안젤라 일에 관해서는 마을 사람 모두가 당신 편이예요. 하지만 광고판에 관해서는 아무도 당신 편이 아니예요.”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먼드)에게 경찰서장 윌러비(우디 해럴슨)를 비난하는 광고판을 내릴 것을 설득하러 온 몽고메리 신부(닉 시어시)의 말에서 난 기시감을 느꼈다. 지난 몇 년 간 반복해서 들어온 목소리들과 그 논조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정부에 책임을 묻는 건 정치적 의도가 있는 거 아니냐. 아버지가 혼수상태인데 시댁 식구들과 여행을 다녀오다니 진정성이 의심된다. 탄압과 혐오를 당하는 건 안 됐지만 그걸 요란스럽게 퍼레이드를 하면서 외쳐야 하냐. 합리와 이성을 가장해 침묵을 강요하던 이 말들 뒤엔 꼭 이 한 마디가 따라 붙었다. 돕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태도를 보면 그 마음이 싹 가신다고.


이들에 따르면 피해자는 도덕적으로 무결해야 하고 공격적으로 굴어선 안 된다. 오로지 비탄에 젖어 고개를 숙인 채 아무 일도 벌이고 있지 않아야 비로소 제 동정과 연대를 받을 자격을 얻는다. 모두가 피해자의 진정성을 심사하는 판관 놀이를 하는 분위기를, <쓰리 빌보드>의 밀드레드는 온 몸으로 박살낸다. 경찰을 공격하는 광고판을 세워봤자 경찰의 표적이 될 뿐이라 지적하는 전 남편 찰리(존 호크스)의 말에 밀드레드는 “더 많이 관심을 끌수록 사건이 해결될 가능성도 더 높아”진다고 분명히 말한다. 원하는 게 확실하니, 제 병을 고백하며 인정에 호소하려는 윌러비에게도 눈 하나 깜빡 않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죽고 난 다음이면 광고효과도 떨어질 거잖아요.” 세상 사람들이 어찌 생각할지 걱정하느라 세상이 원하는 피해자상을 연기할 생각 따위, 밀드레드의 심중엔 한 톨도 없다.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운 태도’를 강요하기 시작하면 어떤 지옥이 펼쳐질까? 그 지옥을 우리는 이미 <한공주>를 통해 본 적이 있다. “전 잘못 한 게 없는데요.” 자신에게 타향으로 떠나 있을 것을 종용하는 어른들 앞에서 공주(천우희)는 묻는다. 왜 잘못 한 사람들을 벌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추방하는지. 공주를 새 학교로 데려다 준 선생(조대희)은 기묘한 답을 들려준다. “공주야, 너 잘못 안 한 거 다 알아. 그런데 그게 아니야. 잘잘못은 법원 가서 따지는 거고. 사람 사는 세상에 뭐 잘못했다고 죄인이고, 그러지 않았다고 그러지 않은 것도 아니야.” 잘못이 없어도 죄인이 될 수 있는 곳이 세상이니, 고개 들지 말고 시키는 대로 살라는 이야기다.



경찰서에서도 그랬다. 형사는 공주의 휴대폰 발신목록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에게 건 전화 내역을 찾아 보여주며 묻는다. “다 네 친구잖니.” 공주를 찾아온 아버지(유승목)는 새 환경에 적응해 잘 지내보려 하는 공주의 말을 욕설로 받는다. “지낼 만 해?” “응, 좋아.” “좋기는, 니미럴.”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는데 어떻게 좋을 수 있냐는 듯. 물론 이 중 누구도 진짜 공주의 마음이 어떤지, 무엇을 욕망하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제 눈 앞에 있는 상대가 온순한 피해자이기를, 그래서 제 마음을 크게 불편하게 만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공주는, 또 다시 죄없이 근신을 당하게 되는 순간 침묵을 택한다. 항변해 봤자 안 들어 줄 거니까, 소리 내면 또 소리 낸다고 더 싫어할 거니까.


우리가 딕슨(샘 록웰)을, 찰리를, 공주를 괴롭히는 수많은 이들을 비난하는 건 쉽다. 하지만 우리라고 피해자에게 피해자답기를 요구하는 폭력을 안 저지르고 살까? 어떤 미투는 진짜 미투가 아닌 것 같다고 미투의 판관이 되고, 내가 나간 시위는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는 평화 시위지만 저 시위는 정부의 발목을 잡는 억지 시위라며 비난하는 이들이 우리 사이에도 섞여 있지 않던가? 피해자 또한 살아 숨쉬고 일상을 살며 때로 분노할 줄 아는 인간이며, 우리가 누군가와 연대하는 기준은 상대가 얼마나 도덕적이고 온순한가가 아니라 상대가 당한 일이 부당한가 아닌가여야 한다. 그 사실을 잊기 시작하면, 세상은 가도 가도 미주리 주 에빙일 것이고 공주는 영원히 정주하지 못할 것이다.

<한공주>(2014)
감독
이수진

주연
천우희, 정인선

시놉시스
열 일곱, 누구보다 평범한 소녀 한공주. 음악을 좋아하지만 더 이상 노래할 수 없고, 친구가 있지만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다신 웃을 수 없을 것만 같았지만 전학간 학교에서 만난 새로운 친구와 노래는 공주에게 웃음과 희망을 되찾아준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전 학교의 학부형들이 공주를 찾아 학교로 들이닥치는데… 한공주, 그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승한

TV 칼럼니스트. "공부는 안 하고 TV만 보니 커서 뭐가 될까"라는 주변의 걱정에 인생을 걸고 허덕이며 답변 중.


*이승한 칼럼니스트의 더 많은 B-Side는 <월간 윤종신> 웹사이트에서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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