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문라이트> | 이승한의 B-Side
연인 오를란도(프란시스코 리예스)의 장례식장에 다녀오는 길, 마리나(다니엘라 베가)는 오를란도의 아들인 브루노(니콜라스 자베드라)와 그 친구들에게 린치를 당한다. 백주대낮의 산티아고 거리를 걷던 마리나는 브루노 일당에게 납치되듯 끌려가 그들의 SUV에 태워진 뒤, 얼굴에 셀로판 테이프가 칭칭 감긴 채 사람 없는 뒷골목에 쓰레기처럼 버려진다. 역겨운 호모 새끼라는 욕설이 가래침처럼 달라 붙어 있는 채로. <판타스틱 우먼>의 이 장면은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상징으로 가득하다. 자기 자신인 채로 사람들의 시야 속을 걷다가, 상이 온통 일그러진 채로 사람들의 시야 밖으로 떠밀리는 여정. 그저 사랑하는 사람의 장례식에서 제 슬픔을 표하고 고인을 기억하고 싶었을 뿐인데, 세상은 자꾸 마리나를 눈에 안 보이는 곳에 격리하고 싶어한다.
오를란도의 유가족과 세상이 마리나에게 온갖 혐의를 덧씌우고 의심과 경멸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이유는 그가 비수술 MTF 트렌스젠더이기 때문이다. “미안한 말인데, 당신을 보고 있으면 키메라 같아요.” 오를란도의 전처 소니아(아린네 쿠펜하임)는 공손한 말투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을 던진다. 일터에 찾아온 경찰 안토니아(암파로 노구에라)는 마리나에게 자신은 온갖 성폭력 사례를 다 보았기에 ‘마리나 같은 이들’을 지지한다는 말을 늘어놓지만, 결국은 마리나가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변태 성행위나 폭력이 있었을 것을 의심하고 있다는 얘기다. 마리나는 오를란도를 애도할 권리를 얻기 전에, 일단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인정받을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사랑하는 이는 죽었지만 혐오는 현재진행형이고 삶은 계속 되어야 하기에. 마리나는 그 모든 핍박과 모멸을 피하지 않고 그 속을 가로질러 간다.
한낮의 거리를 자기 자신으로 걷기 위해 마리나가 겪는 수난을 보며, 문득 모두가 푸른 색으로 보이는 달빛 속에서야 비로소 제 자신을 확인할 수 있었던 <문라이트>의 샤이론(애쉬턴 샌더스)을 떠올렸다. 샤이론의 삶은 제 자신을 드러냈다가는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만큼 아슬아슬한 기반 위에 서 있다. 덩치도 작은 샤이론은 안 그래도 눈에 띄기 쉬운 표적인데, 구조화된 가난과 차별 속에서 버티기 위해 과장된 남성성과 공격성을 학습한 흑인 공동체의 분위기는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을 드러낼 수 없게 만든다. 마약 중독자 엄마(나오미 해리스)가 기다리는 집은 샤이론에게 그 어떤 위안도 되지 못하고, 어린 자신의 멘토가 되어줬던 후안(마허샬라 알리)은 죽고 없다. 자신을 조금도 드러낼 수 없는 진공 속에서 숨막혀 하던 샤이론은, 달이 빛나던 밤의 해변에서 친구 케빈(자렐 제롬)의 손으로 사정한 후에야 비로소 제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달빛 속에서 발견한 제 삶은 햇빛이 찬란한 한낮의 학교에서 다시 한번 철저하게 부정 당한다.
뒷골목에 혼자 버려진 채 주차된 차창을 거울 삼아 얼굴에 감긴 셀로판 테이프를 떼어내는 마리나를 보며 생각했다. 뒤틀린 건 마리나가 아니라 그렇게 마리나를 뒤틀어서 보고 싶어하는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들의 시선이라고. 우리는 <패왕별희>나 <왕의 남자>를 보며 성소수자들의 로맨스를 신화화하고,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며 일평생 자신을 속이고 살아야 했던 게이들의 가슴 절절한 사랑 이야기에 감동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대낮의 산티아고 거리를 걷고자 할 때, 세상은 그들에게 달빛의 마이애미로 들어가 자신들끼리만 살아갈 것을 강요했다. “굳이 그렇게 백주대낮에 퍼레이드까지 해야겠느냐”는 노골적인 혐오부터 “동의는 하지만 아직 사회적 논의가 부족하니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교묘한 혐오까지, 우리가 세상 모든 마리나와 샤이론의 얼굴에 휘감아 둔 셀로판 테이프는 여전히 질기고 떼어내기 어렵게 엉켜 있다.
나는 어린 샤이론에게 마리나가 부르는 헨델의 ‘Ombra mai fu’를 들려주는 상상을 해본다. 마리나의 얼굴에 붙은 셀로판 테이프를 함께 떼어주고, 마리나의 개 디아블라와 함께 산책을 하는 상상도 해본다.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 햇살 찬란한 서울의 거리를 그들과 같이 걷고 싶다. 응당 그래야 하지 않겠나.
<문라이트>(2016) Moonlight
감독 배리 젠킨스
주연 알렉스 R, 히버트, 에쉬튼 샌더스, 트래반트 로즈, 마허샬라 알리
시놉시스
마이애미를 배경으로 한 흑인 아이가 소년이 되고 청년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푸르도록 치명적인 사랑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
TV 칼럼니스트. "공부는 안 하고 TV만 보니 커서 뭐가 될까"라는 주변의 걱정에 인생을 걸고 허덕이며 답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