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달의 영화가 <스위스 아미 맨>(2016)으로 결정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순간, 나는 비명을 지르며 담당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 영화랑 닮은 꼴인 영화를 어디 가서 찾아요!”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이해하리라. 꿈도 희망도 없어서 세상을 등지려 했던 루저 행크(폴 다노)가, 끊임없이 방귀를 뀌어 대고 입에서 물을 토하며 발기된 성기로는 집으로 돌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시체 매니(대니얼 래드클리프)와 함께 인생의 의미를 탐구한다는 영화 아닌가. 시체훼손과 화장실 유머를 시적인 화면과 명상적인 연기와 함께 버무려 만든 이 눈물 나게 아름다운 영화는, 더럽고, 아름다우며, 더럽게 아름답다. 다시 말하자면, 닮은 영화를 짝 지어주기 더럽게 어려운 영화다.
문득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때 영화를 보고 나오다 마주친 김세윤 작가의 표정도 뇌리를 스쳤다. 당시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던 김세윤 작가는, 이 영화를 부천으로 데려와 줘서 고맙다는 나의 인사에 뿌듯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로 화답했다. 영화를 수급해오기 위해 거쳤던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던 걸 게다. 천신만고 끝에 붓두껍에 목화씨를 숨겨오는 데 성공한 문익점이 아마도 이런 미소를 지었겠지. 하지만 작가님, <월간 윤종신> 이 달의 영화라뇨. 짝 지어줄 영화를 찾아야 하는 제 입장도 생각해주시지 그러셨어요…. 아직 <스위스 아미 맨>을 못 봤다는 담당자는, 나의 비명에 선량하고 맥 없는 답을 보냈다. “화…화…이팅입니다 ㅠㅠ”
며칠을 고민한 끝에 품에서 꺼낸 영화는 이해준 감독의 영화 <김씨표류기>(2009)다. 이자가 붙어 대출원금의 두배를 훌쩍 넘긴 빚 액수를 확인한 남자 김씨(정재영)는 한강 다리에서 몸을 던지지만, 그나마 죽지도 못하고 서울 한복판 밤섬에 홀로 표류한다. 다시 도시로 돌아갈까, 아니면 목이라도 매달아야 하나. 고민하던 남자 김씨는 이상하게도 마음을 편하게 먹는다. 섬 곳곳에 피어 있는 버섯을 뜯어 먹으며, 허기를 달랠 수 있으니 좋고 먹다가 잘못되어 죽어도 상관없다 중얼거리며. 회사가 도산한 후 새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새 직장을 구하지 못한 탓에 빚더미에 올라 앉았는데 그걸 극복할 방도가 없는 제 못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버리는 순간, 밤섬은 유폐지가 아니라 남자를 위한 훌륭한 성채가 된다.
남자 김씨의 마음을 아는 건 히키코모리 여자 김씨(정려원) 뿐이다. 흉터 난 얼굴을 조롱할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는 달 사진을 찍는 게 취미인 여자 김씨는, 세상이 잠시 멈추는 민방위 훈련을 틈타 도시의 풍광을 찍으려 망원렌즈를 창밖으로 뺐다가 남자 김씨를 발견한다. 밤섬 모래톱에 HELP라고 구조요청을 적어뒀던 남자 김씨가 메시지를 HELLO로 고친 걸 본 순간 여자 김씨는 깨닫는다. 이유는 몰라도 저 사람도 나처럼 갇혀 있는 게 편한 거로구나. 여자 김씨는 남자 김씨에게 유리병에 담은 편지를 보내려 한다. 그러려면 밤섬 근처 다리까지 가야 한다. 여자 김씨는 3년 간 나선 적 없는 집 밖으로 조심스레 걸어 나간다. 갇혀 있는 게 편하고 세상이 무서워도 괜찮다고, 나도 그렇다고,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 스스로 갇힘을 깨 버리는 이 아이러니. 그렇게 남자 김씨와 여자 김씨는 서로의 고립과 표류를 긍정해주는 것으로 희망을 교신한다.
행크와 매니의 여정도 그렇다. 그 기이한 모험은, 결국 우리는 모두 조금씩은 뒤틀려 불완전한 존재들이란 걸 받아 들이기 위한 여정이었다. 누구나 남들이 안 보는 곳에서는 방귀를 뀌고 침을 뱉는 것처럼. “누구나 조금은 추할지도 몰라. 모두 추하게 죽어가는 존재인지도 모르지. 그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더도 말고 딱 한 명만 있다면, 온 세상이 노래하고 춤추고 방귀를 뀔 거야. 다들 조금씩 덜 외로워질 거라고.” 매니의 말에 행크는 이렇게 답한다. “방금 네 말이 얼마나 근사하게 들리는지 넌 모를 거야.” 매니가 옳다. 어쩌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자신의 못남을 직시하고 긍정하는 일에서 시작하는 건지 모른다. 세상에 나갈 자신이 없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긍정해 준 김씨들이 그랬던 것처럼.
<김씨 표류기>(2009)
감독 이해준
주연 정재영, 정려원
시놉시스
자살시도가 실패로 끝나 한강의 밤섬에 불시착한 남자. 죽는 것도 쉽지 않자 일단 섬에서 살아보기로 한다. 모래사장에 쓴 HELP가 HELLO로 바뀌고 무인도 야생의 삶도 살아볼 만하다고 느낄 무렵. 익명의 쪽지가 담긴 와인병을 발견하고 그의 삶은 알 수 없는 희망으로 설레기 시작한다.
자신의 좁고 어두운 방이 온 지구이자 세상인 여자. 홈피 관리, 하루 만보 달리기… 그녀만의 생활리듬도 있다. 유일한 취미인 달사진 찍기에 열중하던 어느 날. 저 멀리 한강의 섬에서 낯선 모습을 발견하고 그에게 리플을 달아주기로 하는 그녀. 3년 만에 자신의 방을 벗어나 무서운 속도로 그를 향해 달려간다.
TV 칼럼니스트. "공부는 안 하고 TV만 보니 커서 뭐가 될까"라는 주변의 걱정에 인생을 걸고 허덕이며 답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