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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윤종신 Sep 08. 2018

남산맨션

젊은 작가가 쓰는 한남동에 대한 짧은 픽션 - 한남동 이야기

지난여름 남산맨션 일층에 있는 보마켓에 매일 들렀다, 고 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했다. 남산맨션에 살았다면 매일 들를 수 있었을 텐데. 친구에게 말했고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남산맨션 앞 건널목에 서서 한 동짜리 건물을 바라보았다. 정문으로 차가 드나들었다. 평범하지만 운치 있는 장면이다. 여기 김수근이 지었어. 내가 말했고 친구는 얼마냐고 했다. 찾아볼까. 핸드폰으로 검색해보니 40평에 9억. 9억이면 괜찮네. 김수근이 지은 것치고 싸네. 우리는 무의미한 대화를 나눴고 그동안 신호등은 계속 빨간불이었다. 근데 왜 신호 안 바뀌어? 알고 보니 보행자 작동 신호등이었다. 뒤에 온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버튼을 눌렀고 곧 파란불이 켜졌다.


보마켓에는 다른 친구가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있었다. 다른 친구가 일하고 있는 보마켓에 처음 가게 된 건 다른 친구와 사귀는 친구와 한강진역에서 우연히 마주쳤기 때문이다. 친구는 시간 되면 커피 마실래요, 라고 했고 처음 보는 길로 나를 데리고 갔다. 보통 한강진역에서 이태원 방향으로 가야 카페나 뭐가 나오는데 친구는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수풀이 우거져 잘 보이지 않는 좁은 길이었다. 중간에 남산예술원 웨딩홀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남산맨션 일층에 있는 보마켓에서 친구가 일해요. 친구가 말했다.


나는 보마켓에서 친구들과 에그 샌드위치를 먹으며 커피를 마셨고 보마켓과 사랑에 빠졌다. 보마켓의 마스코트인 프렌치 불도그 ‘장미’를 산책시켜주기도 했고 다음날은 또다른 친구와 테라스에 앉아 화이트 와인을 마시기도 했다. 테라스엔 테이블이 두 개밖에 없고 늘 비어 있어 좋다. 가끔 동네 주민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앉아 있기도 한데 차림이 세련된 분들이라 눈이 즐겁다. 나와 친구는 와인을 마시고 붉어진 얼굴로 남산맨션 주위를 걸었다. 김수근이 지은 거라 뭔가 다르지 않아? 내가 말했고 친구는 아파트를 한참 올려봤다. 평범한데. 위치도 좋고 일층 상가의 분위기도 좋지만 아파트는 평범하다고 했다. 나는 왠지 발끈하는 기분이 들어 로비로 성큼 걸어가며 입면과 기둥, 바닥을 가리켰다. 이걸 보라고, 김수근이라니까! 사실 김수근을 좋아하지도 않고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그러게, 90년대 홍콩 분위기도 나고 아피찻퐁 영화 느낌도 나지만 특별한 건 없지, 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알려지지 않은 힙 플레이스를 소개했다는 생색을 내고 싶어 우겼던 것 같다. 친구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줬다. 특이하네. 그래! 원래는 1972년에 호텔로 지어진 건물인데 아파트가 된 거라고!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해!

실제로 여러 매체에서 남산맨션을 다뤘다. 대부분은 패션지로 남산맨션에 사는 디자이너나 예술업계 종사자의 집을 소개해주는 기사였다. 기사 앞머리에는 복사해서 붙인 듯한 다음과 같은 소개가 이어진다. 1972년 김수근 건축가가 지은 건물로 독특한 내부 구조와 레트로한 무드를 자랑하는…… 남산맨션 펜트하우스에 있다는 한남클럽에 대한 경제지 기사도 있다. 7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상류 1%를 위한 멤버십 클럽으로……


구글에 ‘남산맨션 김수근’이라고 쳤다. 여러 기사와 부동산 소개글 가운데 어떤 건축가가 쓴 블로그가 눈에 들어왔다. ‘김수근이 지은 남산맨션은 건립 연도가 1965년이다. 현재의 남산맨션이 그가 지은 것인지는 검증이 필요하다……’ 혹시 하는 마음에 김수근 재단에 들어가 작품 목록을 보니 정말 1965년에 남산맨션을 지은 걸로 나온다. 소개는 아래와 같다.


연도_1965
위치_용산구 이태원동 258-59
60년대 중반에 외국인을 위한 공동 주거로 설계된 이 건물은 남산과의 조화를 위하여 도로 면에서 바라볼 때 계단식으로 후퇴시키는 기법을 사용하여 독특한 외관을 보여준다. 총 16호의 단층, 복층 주거와 주차 공간을 수직으로 교묘하게 결합한 매우 복잡한 단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재단 홈페이지에는 남산맨션 사진도 있다. 사진에서 보이는 발코니는 현재의 남산맨션과 다르다. 주소를 확인하니 위치 역시 다르다. 김수근이 지은 남산맨션은 현재의 남산 야외 식물원 쪽에 있었다. 어떻게 된 걸까?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뒤져보니 쉽게 답이 나왔다. 1971년 7월 19일자 경향신문 기사,  ‘서울 새 풍속도, 서울의 새 명물 남산맨션’. 한미합작투자로 세워지는 국내 최초의 호텔어파트먼트라는 내용이다. ‘우리네 실정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야말로 딜럭스맨션의 기념비적 건물…… 설계자는 미국에서 활동중인 교포 박관도씨’. 그러니까 김수근이 지은 건물이 아닌 거다.


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 두시였다. 왜? 남산맨션…… 김수근이 지은 거 아니래. 우리는 잠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래도 분위기는 좋잖아. 몰라, 이제 안 갈래. 김수근 좋아해? 아니…… 건물은 이탈리아가 짱인데. 로마에 있는 아파트 가봤어? 어쩌고저쩌고…… 남산맨션의 원래 이름은 호텔 코리어너다. 그렇다면 원래의 남산맨션은 어떻게 된 걸까. 남산에 있던 외인아파트 등은 1994년 남산 제모습찾기사업 때 헐렸는데 그때 같이 사라진 걸까.


아무튼 보마켓 에그 샌드위치 진짜 맛있었는데. 친구가 말했고 나는 건물이 평범하다고 말한 친구의 눈이 정확하다고 했다. 친구는 평범해서 좋다는 뜻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평범한 아파트도 못 사. 하…… 나는 한숨을 쉬었다. 모든 대화의 끝은 돈 이야기다. 한숨 좀 그만 쉬어. 친구가 말했다.



정지돈

1983년 대구 출생. 2013년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낸 책으로 소설집 『내가 싸우듯이』, 소설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평론집 『문학의 기쁨』(공저) 등이 있다. 저축을 안 하고 마포구 밖으로 나가는 걸 싫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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