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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윤종신 Sep 29. 2018

개와 거장

젊은 작가가 쓰는 한남동에 대한 짧은 픽션 - 한남동 이야기

나는 오늘 종일 여자친구와 한남동에 있었다. 미세 먼지가 유독 심한 날이었다. 우리는 함께 마스크를 착용한 채 가보기로 벼르던 식당을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숨을 내쉬자 안경에 입김이 생겼다. 시야가 답답해 마스크를 턱밑으로 내리면 여자친구가 당장 마스크를 쓰지 못하겠냐고 윽박을 질렀다. 나는 안경을 벗었다. 형편없는 시력 때문에 풍경이 흐릿해졌다. 여자친구는 세기말 풍경을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먼지 입자들이 느리게 떠다니는 게 다 보이잖아. 나는 여자친구에게 내가 최근 마감한 소설 이야기를 해주었다. 더 잘 쓰려면 좀 말을 줄이는 편이 낫겠다. 여자친구가 대꾸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말이야…… 넌 매일 그러더라…… 


식당에서 카레라이스를 먹고 나오는데 길거리에서 비비와 릴리를 끌고 다니는 거장을 목격했다. 순간 나는 눈을 의심했다. 비비와 릴리는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꼬리를 빠르게 흔들었다. 나는 사람을 따라 하는 개들의 그런 생글거리는 표정을 좋아했다. 비비와 릴리는 거장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두 마리 맹견이다. 실제로 맹견은 아니다. 거장의 소설에서는 주인공인 괴팍한 과학자의 저택으로 침입한 익살스러운 도둑들의 엉덩이를 깨물어버리기도 하지만 말이다. 콧수염을 말총처럼 기른 거장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으며 비대한 상반신에 타이트하게 달라붙은 자주색 피케 셔츠를 입고 있었다. 배가 남산만큼 나왔군. 나는 생각했다. 그는 존재만으로 부담스러운 프랑스인 거장이었고 비뚤어진 코가 흡사 녹아내린 양초를 닮아 있었다. 나 저 코 알고 있어. 거장의 얼굴은 일 년 전까지 내 노트북 바탕화면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구글링으로 거장의 사진을 긁어모았다. 인스타그램에 올리거나 인쇄해 책상 옆 게시판에 압정으로 꽂아놓기도 했다. 저 사람 책은 두 권 빼고 다 명작이야. 노벨상 받고 망했잖아. 중국 가서 판다들이랑 사진이나 찍고 말이야. 나는 말했다.


나는 언제나 거장과 만나는 날을 기대해왔으며 제자리에서 호들갑을 떨었던 것 같다. 거장은 인간의 존재론적 공포 운운에 천착하는 작가였지만 최근 그러한 세계관을 온전히 망실한 채 전 세계로 강연을 다니며 아끼는 애견인 비비와 릴리에게 세계여행을 시켜주고 있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삶의 방식이었다. 거장은 이태원역 근방의 한 호텔에 투숙하며 여행 기간 내내 개들을 끌고 호텔 주변으로 산책을 나올 것이다. 아장거리며 인도를 질주하는 비비와 릴리에게 한국의 분위기를 선물하기 위해 하염없이 시간을 소모할 것이다. 나는 뉴델리에서, 오사카나 상하이에서, 프라하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꼭 같은 차림으로 산책을 나온 거장의 사진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최근 문학이 나를 속였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했다. 그러니까 문학이 나를 속였으며 나는 문학의 그리 정교하지도 못한 속임수에 어눌하게 미혹되었다. 그 어쩔 수 없는 생각들 속에서 나는 허황된 문학 다단계의 희생자였고 거장은 그 허구적인 금자탑의 은폐된 정점에서 개최되는 문학 전당대회의 음험한 서기장이었던 것이다. 나는 항상 비뚤어진 생각들에 능했고 단지 그러한 망상의 전개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했다.


내가 아는 정보에 의하면 비비와 릴리는 죽음이 가까워오는 노견이었다. 여자친구는 개들에게 마스크를 씌워주고 싶다고 했다. 공기가 이렇게 나쁜데. 내리막길로 향하는 거장과 릴리와 비비의 뒤뚱거리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마치 내가 위대한 문학의 천사를 엿본 것만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거장은 한국의 분위기가 미세먼지로 인해 어둡고 음울한 세기말 풍경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나는 거장의 소설에서 안개가 낀 항구와 수평선을 묘사하는 대목을 사랑했다. 잿빛 항구로 스산한 파도 소리가 들리고…… 창백하게 빛나는 얼굴을 가진 소년 하나가 나풀거리는 안개 속에서 그림자처럼 사라졌다가…… 어머니의 소매를 붙잡은 채 되돌아오고…… 끔찍하게 과장된 갈매기들이 안개 속에서 돌연하고 발작적으로 출현하며…… 거장의 성마른 손이 비비와 릴리에게로 이어진 목줄을 놓치면 으르렁거리는 비비와 릴리가 안개 저편으로 뛰쳐나간다. 흐릿함 속을 재빠르게 내달린다. 거장은 안개 너머를 멍하니 바라본다. 비비와 릴리가 돌아오면 거장은 헐떡거리는 비비와 릴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제자리에 서서 무거운 어조로 기다려, 하고 말한다. 얌전하게 주저앉은 비비와 릴리의 목덜미를 여러 차례 쓰다듬어준다.

그날 나는 여자친구의 손을 잡고 한남동을 거닐며 거장을 총 세 차례 만났다. 거장은 그늘 밑에서 개들에게 시원한 바람을 쐬어주었다. 릴리가 길가에 대변을 보면 챙겨온 비닐봉지를 손에 씌운 채 대변을 주웠다. 뱃살 때문에 허리를 굽히는 일이 어려운지 한 장소에서 부자연스럽게 끙끙거렸다. 나는 연약하게 바스락거리는 시간을 땔감으로 작가들이 가장 잘 하는 일이란 기다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다리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작가들은 자신도 모르게 기다림의 텅 빈 중심에 머무르고, 시간이 지나는 과정에서 이 기다림 자체에 도착적으로 몰두하기까지 한다. 기다림은 연이어 계속된다. 기다림은 그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 대상이 완전히 망각될 때까지 지루하며 집요하게 이어진다. 마침내 그들은 자신이 기다리던 대상이 누구였는지 짐작할 수 없게 되고, 이때 그들이 보유한 기다림이란 이러한 아둔함과 팽배한 무지를 통해 무한히 연장될 수 있는 성질의 무엇이다. 죽음 직전에 놓인 작가들은 그저 기다림을 위해 기다리고, 한때 자신이 기다렸던 문학의 천사가 도착하면 샐쭉하게 입술을 내밀고 드디어 나타난 문학의 천사를 향해 꿀밤을 먹인다. 치켜든 숟가락으로 천사의 정수리를 반복적으로 내리친다. 천사의 대가리는 깨지지 않는다. 


너 때문에 비비와 릴리가 죽었잖아. 이 개새끼야. 얼른 살려내지 못해. 비비와 릴리를 돌려주지 못해. 내게 비비와 릴리의 영혼을 보여주지 못해. 한 번만 더 만나보고 싶단 말이야. 천사의 멱살을 붙잡은 거장이 애원한다. 거장은 문학의 천사를 만난 다음에도, 오해를 풀고 함께 커피를 마신 다음에도, 문학의 천사가 훌쩍이며 가버리고 난 다음에도 죽은 비비와 릴리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것이다. 나는 그 감정을 알지 못한다. 그 감정은 거장의 문학 속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나는 마스크를 쓴 거장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거장의 두둑한 콧방울은 마스크로도 전부 가려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여자친구에게 저 사람이 그 거장이 맞냐고 여러 번 되물었다. 여자친구는 대답이 없었다. 마스크 안쪽이 물기로 흥건했다. 나는 여자친구와 함께 카페에 도착해 마스크를 벗었다. 안경을 썼다. 자리에 앉아 창가 너머를 바라보면서 한번만 더 거장이 지나가기를 바랐다. 거장의 모습이 꿈처럼 느껴졌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으며, 어스름한 거리는 사람으로 붐볐다. 커피는 차갑고 산뜻했다. 거장이 카페 앞을 지나치면 좋겠다. 비비와 릴리를 잃어버린 거장이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한남동 골목을 들쑤시고 다녔으면 좋겠다. 비비와 릴리를 애타게 부르며 담벼락에 전단지를 붙이고 다녔으면 좋겠다. 엉엉 울어버렸으면, 거장이 이러한 치명적인 상실을 계기로 미세먼지 자욱한 한반도에 영구적으로 정착했으면 좋겠다. 망상이었으며 가능한 생각이 아니었다. 나는 대학원 과제 때문에 괴로워하는 시인에게 카톡을 보냈다. 그러자 답장이 왔다. 시인은 드디어 거장의 소설을 읽었고, 난해해서 무슨 내용인지는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빛나는 문장들을 찾을 수는 있었다고 했다. 사인 받을걸. 내가 말하자마자 여자친구가 창밖을 가리켰다. 비가 세차게 내리치고 있었다. 물보라와 새하얗게 피어오르는 증기 속에서 검고 커다란 방독면을 뒤집어쓴 거장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유령처럼. 나는 무서웠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흠뻑 젖은 비비와 릴리가 잘린 손목을 입에 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내가 거장의 소설을 통틀어 한 번도 마주한 적 없었던 바로 그 장면이었다.



양선형

1990년 광주 출생. 2014년 『문학과 사회』 신인상으로 등단. 옛 거장들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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