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월간 윤종신 Sep 25. 2018

한남동에는 점집이 많다

젊은 작가가 쓰는 한남동에 대한 짧은 픽션 - 한남동 이야기

J와 M은 그날 한남동 성당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약속 시간은 네시였는데, M이 이태원역에서 내렸을 때는 이미 세시 오십분이었다. M은 대로변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J도 도착 전인지 아직까지 휴대폰이 잠잠했다. 사실 J는 오늘 약속을 별로 탐탁지 않아 했다. 점집에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M이 처음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 J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집은 그런 거 별로 안 믿어.

J의 말에, M은 조금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궁합이라니. J가, J의 가족이 무속 신앙이나 사주를 믿지 않는다는 건 M도 알고 있었다. J의 가족은 일요일이면 의무적으로 교회에 나갔고, 제사는 물론 명절 차례도 지내지 않는다고 했다. 어쩌면 M이 약속 장소를 성당 앞으로 잡은 것은 J의 퉁명스러운 말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J의 가족과 달리 M의 모친은 ‘그런 걸’ 믿는 사람이었다.


벽돌색의 성당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그 옆은 공사중이었는데, 펜스에 붙어 있는 건물 조감도가 아니었으면 무엇을 짓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붉은색의 흙만 잔뜩 쌓여 있었다. M의 모친이 예약해놓았다는 점집은 성당 앞의 오래된 주택단지에 있었다. 예약 시간은 다섯시였다. M의 계획은 J와 조금 일찍 만나 근처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 점을 보러 가는 것이었다.


M은 성당 맞은편에 있는 집 담장에 기대 휴대폰을 확인했다. 네시 십분이 넘어 있었다. J로부터 조금 늦는다는 문자가 와 있었다. J의 자취방에서 한남동까지는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J가 하필이면 한남동이냐고 물었을 때, M은 한남동에 유명한 점집이 많다고 대답했다. M의 대답은 모친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지만, M은 사실 한남동이 아니라 서울의 다른 어떤 곳이었어도 J가 그렇게 물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경기도에 있는 J의 집에서는 서울 어느 곳이든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데이트는 대부분 J의 집과 M의 집의 중간 지점, 혹은 서로의 동네에서 소소하게 이루어졌다. 그렇게 세 지점을 빙글빙글 돌며 육 년을 지내다보니, 관계에 권태가 찾아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네시 이십분이 넘어가자 M은 J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건조한 신호음이 넘어갔고 J가 전화를 받았다. M이 말했다.
어디야?
거의 다 왔어.
그러니까 어딘데.
한남동 교회 근처.
M은 한남역에서 한강진 방향으로 올라가는 대로변 근처에 교회가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M은 예배라도 드릴 작정이냐며 J에게 빈정거렸다.
한남동 교회가 아니라 한남동 성당인 거 알지?
성당이라고?


J가 전혀 엉뚱한 곳에 있다고 하자 M은 조금 화가 났다. J는 늘 그랬다. 지도 한번 보면 쉽게 찾을 수 있는 길도, 그 한 번을 보지 않아 헤매기 일쑤였다. M은 그렇게 길이 엇갈리고 J가 혼자서 낯선 곳을 헤맬 때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제는 J가 자신을 만나는 일에 조금의 노력도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교회 지나서, 대사관 지나면 성당이 나올 거야.
M의 말에 J는 때에 맞지 않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런데 나, 못 갈지도 몰라.


M은 J의 말에도 한숨이 나왔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J가 그렇게 사람 김빠지는 장난을 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런 말끝에는 항상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말은 ‘나 좀 늦을 것 같아’의 다른 말이었고, 이제는 먹히지 않는 장난이었다. M은 체념한 듯한 어투로 말했다.


……그냥 점집 앞에서 만나자.


통화를 마치고, M은 성당 앞으로 난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안은 좁고 높다랗고 구불구불한 길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다. J가 이곳을 잘 찾아올 수 있을까? 어쩌면 정말로 J가 안 오는 것은 아닐까? 통화를 끊고 나자,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J는 이곳으로 오는 걸 포기할지도 몰랐다. 정말 J가 오지 않는다면, 엄마한테는 뭐라고 하지? 초조한 마음이 들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낡은 세탁소와 카페, 문이 닫힌 떡집과 작은 슈퍼를 지나, M은 점집 앞에 도착했다. M은 목적지에 도착하고서도 그곳이 자신이 찾던 곳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낡은 다가구주택 이층에 복암사라고 쓰인 붉은색 간판이 전부였다. J는 보이지 않았다. M은 점집의 입구를 찾아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겨우 찾은 흰색의 낡은 쪽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 이제 시간은 다섯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M은 그 앞에서 J를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M은 J가 올 방향으로 조금 더 걸어간 뒤, J에게 문자를 보냈다.


경남 슈퍼를 끼고 왼쪽으로 돌면 다가구주택 이층에 복암사라는 점집이 보일 거야.
J에게서 곧바로 답장이 왔다.
여기 점집이 너무 많아.
어딘데. 주변에 뭐가 있어?
작은 편의점 하나 있다. 그것 말고는 전부 주택.
경남 슈퍼가 아니고? 거기가 도대체 어디야?


J에게는 답이 없었다. M은 이전보다도 더 초조해했는데, 초조하면 초조할수록 마음 한구석으로는 J가 포기되기도 했다. M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거기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를 주저했기 때문이다. 생각 끝에 어딘가에 도달하고, 어떤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는 것은 M이 가장 기피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때 M의 머릿속으로 자신이 지나온 작은 슈퍼가 떠올랐다. 경남 슈퍼는 M이 지나온 곳에 있던 슈퍼였다. J가 오는 방향에서는 경남슈퍼가 점집을 지나야만 볼 수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J가 자신 때문에 헤매고 있을 걸 생각하니 M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M은 서둘러 J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고 J가 전화를 받았다. J는 M이 입을 떼기도 전에 말했다.


못 가겠어.
지금 어딘데? 저기, 내가 길을……
M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J가 말했다.
내가 못 갈 수도 있다고 했잖아.
……너 나한테 오고 있다고 그랬어. 여태 오고 있는 척한 거야?
가고 있었어. 그 앞까지 갔었어.
그러니까 지금 어딘데?
모르겠어.
M은 J의 답을 기다렸다. 수화기 너머 J가 있는 곳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J가 먼 곳을 헤매고 있는 사람처럼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짧은 침묵이 오갔다. M은 J에게 알겠다고 했다. 사실 M은 알지 못했는데, 그렇게 말하고 나자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푸름

1989년 서울 출생. 201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집에 있으면 자꾸 무언가를 쏟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