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작가가 쓰는 한남동에 대한 짧은 픽션 - 한남동 이야기
약속했던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늦게 나타났는데도, 어쩐 일인지 그는 특별히 나를 힐난하는 기색 없이 맥주나 마시자고 했다. 나는 너무 깔끔하고 완벽하게 늦어버린 나머지 일정 수준의 미안함과 초조함을 넘어 어느 정도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어있었고, 그래서 그가 권하는 대로 그 가정집을 개조한 조용한 카페에 앉아 맥주를 좀 마시다가 이내 한 잔 더 하러 나가자는 제안을 멍하니 수락했다.
그는 내가 마음에 들었다기보다 마침 날씨와 바람이 맥주를 마시기에 아주 절묘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고, 나 역시 맥주를 마시지 않고는 못 배기는 날이라는 데에 전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에 우리는 근방의 골목과 언덕을 이리저리 오가며 계속 맥주를 마셨다. 다세대주택 외벽에 위태롭게 설치된 철제 계단을 올라 4평짜리 피자집에서 크림 스피니치 조각피자를 먹으며 향긋한 IPA를 마셨고, 건물 옥상에 인조잔디를 깔고 노란 알전구를 주렁주렁 매달아 분위기를 낸 루프탑 펍에서 해가 지는 하늘을 구경하며 부드러운 스타우트를 마셨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말을 놓고 이름을 부르게 됐는데 그렇다고 퍽 친밀해진 건 아니었고 별다른 대화 없이 동석인 정도의 느낌으로 각자 맥주만 홀짝였다. 그는 술을 꽤 마셨는데도 얼굴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침묵을 악의 없이 사용하는 편이었고, 입을 열어도 낮고 차분하게 말했기 때문에 아주 고요하게 느껴졌으며, 시선에서도 몸짓에서도 어쩐지 아무런 욕망이 보이지 않았다.
“왜 가지 않고 날 계속 기다렸어? 지루했을 텐데.”
술을 깰 겸 내가 말을 걸었다.
“기다린 건 아니야. 나는 네가 오지 않을 줄 알았어.”
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옆 테이블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어.”
나는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말해보라고 슬쩍 부추겼다. 세상 모든 것에 무심해 보이는 그가 모르는 사람들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듣는 모습이 선뜻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는 잠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한 가지를 확실히 해두었다.
“있는 그대로 말해줄 수는 있지만, 그게 진짜 그들이 나눈 대화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진실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으니 입을 열고 뭐든 떠들면 된다고 그를 타일렀다. 그는 예의 욕망 없는 말투로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마도 오래 사귀어서 서로의 관점이나 생각을 훤히 꿰뚫고 있는 커플 같았어. 카페 인테리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지. 천장을 뜯어내 그대로 노출한 전기배선이나 허물어진 벽 사이로 드러난 벽돌 같은 것들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것이 낡고 사라져가는 공간인지, 건축되며 새롭게 탄생하고 있는 공간인지, 반쯤은 그들 사이의 유대감을 확인하는 장난 식으로 토론을 벌이고 있었어.”
“너는 어떤 것 같은데?”
“나?”
“그래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런 판단은 할 수 없지 않을까. 관찰할 뿐이지. 너는 오늘 나를 두 시간이나 기다리게 했지만 결국 도착했기 때문에 그 두 시간은 네가 나한테 오는데 걸린 시간이 됐어. 하지만 오지 않았다면?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방향도 없는 시간이 됐을 거야.”
“뭐 좋아, 그 커플은 뭐라고 했는데?”
“남자가 로마식 콘크리트를 예로 들었어. 현대적인 콘크리트는 모래나 잘게 부순 돌처럼 화학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재료들을 사용해 만들지만 화산재, 석회, 그리고 바닷물로 구성된 고대 로마의 콘크리트는 오랜 세월 파괴되지 않고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고 남자는 말했어. 바닷물과 화학적으로 교환할 수 있는 광물 시멘트가 해안의 방파제로 쓰이며 수천 년에 걸쳐 성장하고 있다고. 언제나 세계의 지형을 부식시켜온 바다와 파도가 오히려 그 돌을 단단하게 만든다고. 어쩌면 그것은 유한한 한 사람의 인생에서 관찰했을 때, 거의 영원에 가까운 일일 거라고 남자는 말했어. 하지만 그때부터 분위기가 좀 이상하게 돌아갔지.”
“왜?”
“여자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어. 아주 긴 침묵이 흘렀지. 한참 후에 여자가 입을 열었을 때는 조금 엉뚱한 얘길 시작해. 너는 몰랐겠지만, 나는 어릴 때 이구아나를 키운 적이 있어. 여자는 그렇게 말했어. 계속 말했지. 암컷과 수컷 두 마리를 키웠는데 어느 날부턴가 수컷이 암컷을 물기 시작했어. 먹이도 충분했고 암컷이 수컷을 자극할만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끊임없이 암컷의 목과 꼬리를 노리고, 위협하고, 집요하게 괴롭혔지. 나는 암컷이 죽어버릴까 봐 너무 겁이 났어. 얼마 후에 정말 한 마리가 죽었는데 암컷이 아니라 수컷이었지. 죽은 수컷 배에서 지름 6cm가 넘는 결석이 나왔어. 말 그대로 딱딱하고 동그란 돌멩이였는데 나는 살아있는 것의 죽음을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건 나에게 일종의 죽음을 지시하는 하나의 형태가 돼. 삼켜서 몸속에 쌓인 것은 돌이 되는구나. 아프면 가까운 것부터 물게 되는구나.”
“왜 그렇게 뜬금없는 말을 해?”
“남자도 정확히 너처럼 물었어. 여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이렇게 대답해. 그러니까 내 말은, 물론 너는 몰랐겠지만, 나한테는 그 돌을 바라보면서 떠올렸던 복잡한 감정들이 있다는 거야. 그런 시간을 너에게 다 알려줄 수는 없다는 거야. 나는 아직도 이구아나 뱃속에서 나온 그 단단한 돌멩이를 간직하고 있어. 물론 네가 절대로 짐작하지 못하고, 상상도 해보지 않았을 깊고 어두운 곳에 그 돌은 영원히 놓여있을 거야. 모르고 지낸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언젠가 우리를 아주 슬프고 위태롭게 만드는 건 바로 그 작은 돌멩이일 거야. 내 말, 이해할 수 있겠어? 그렇게 물은 뒤 여자는 목소리를 풀고 아무렇지 않게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 남자도 자연스럽게 그런 이야기 속으로,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누구도 해치지 않는 부드러운 이야기 너머로 넘어가. 그들은 잠시 그렇게 나와 아주 가까운 곳에 앉아 대화를 나누다가 홀연히 떠나버린 거야.”
“그게 너를 슬프게 했어?”
“아니 놀라게 했어. 실은 나도 그런 돌이 하나 있거든. 몇 년 전부터 꿈을 꾸면 어김없이 초록색 불빛이 보여. 꿈인 걸 모르다가 문득 시선을 돌렸을 때, 어두운 골목 끝이나 작게 열린 서랍 속, 아니면 누군가의 발치나 그냥 텅 비어있는 허공 어디쯤 그 불빛이 가만히 떠있어. 그러면 나는 이제 한동안 긴 꿈속을 헤매야 한다는 걸 깨달으면서도, 저 너머에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조금은 믿게 되는 거야.”
“안심이 되나보다.”
“모르긴 해도. 그 불빛을 손에 쥐어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그건 빛이 나는 따뜻한 돌멩이일 거라고 늘 생각했어.”
우리는 잠시 아무런 말없이 파도 거품처럼 번지는 야트막한 야경을 바라봤다. 작은 불빛들 사이로 먼 듯 가까운 듯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검은 산 위의 타워가 세계를 지시하는 은은한 초록색 돌처럼 빛나고 있었다.
* 이은영 <밤은 빛나는 하나의 돌> (램프, 흑경, 세라믹, 가변크기, 2018)
작품 인터뷰 참고.
1990년 서울 출생. 2014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자주 침대에서 소설을 쓰고 꿈은 거의 꾸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