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반성문

윤정일 2025

by 윤정일official

전선들이 길게 뽑혀 실타래처럼 엮인 동네

노을 진 하늘에 거미줄이 쳐져 있다


한 정거장도 걸어오기 싫은 밤들을 묶으려는 걸까


빌려준 세월을 제때 갚지 못한 친구에게 연락하던 밤들로부터

더 중요한 걸 잊은 채 터벅이며 집 앞을 지나치던 밤들에까지


널찍이 서있는 전봇대를 올려다 보다

무심히 걸어둔 그물 하날 따라가 본다


거미가 만든 것이 아니다


거미보다 독하고 거미보다 징그러운

그따위 생물의 짓이다


그런 존재들은 사람을 유인하고는

그들이 엮은 덫으로 잡아가 버린다


먼동이 터 오면 서서히 검은 줄이 조용한 모습을 드러낸다 다시


아주 은근하게 마치 나를 옥죄려는 듯


자고 일어나면 키가 더 커지는 걸까

아스라이 닿을 수 없을 거라 믿었던 밤이었는데

왜 아침마다 점점 내려오는 느낌이 들지


이러다 정말 전봇대의 먹이가 될지도 몰라

keyword
작가의 이전글호우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