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산 보해산 (2023년 1월)
어딘가 보물이 묻혀있어서라고도 하고, 예전에 보해사라는 절이 있어서라고도 했다. 경남 거창 보해산(普海山). 이름이 예뻐서 가보고 싶었다. 산행 거리도 길지 않고(9.5km) 시간(6시간)도 넉넉해 보였다. 바위 능선이 이어졌다고 하지만 100 명산도 아니니 로프가 달린 암벽이 조금 있겠지 생각했다. 깊고 맑은 구도자 같은 보해산은 가야산, 우두산, 기백산 같은 1,000m가 넘는 유명한 산들 속에서 외롭게 시간의 층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평일에 오지 산행 가는 사람들은 진정한 산꾼이라고 한다. 100 명산이 아닌 산에는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아 산길이 사라지기도 해서 ‘알바’를 할 위험도 있고 암릉이 이어져 특별히 다리와 발에 힘을 주는 법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들머리부터 보해산 북쪽 경사면으로 바위를 넘나드는 길이었다.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 높은 바위 어디에 발을 딛고 어디를 잡아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산꾼들이 하라는 대로 하고, 도움을 받아 바위를 넘어갔다. 천 길 낭떠러지 밑은 내려다보지 말라고 했다. 심장이 오그라들도록 아찔한 순간이 몇 번 지나갔다. 시작할 때 한 친구가 “죽기야 하겠어.” 했는데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바위에 올라갈 때는 팔에 힘을 빼고 무릎을 피고 다리와 발에 힘을 주라고 했다. 내디디는 한 걸음마다 목숨줄이 달려있어 서툴게 발을 디딜 수 없었다.
정상(911m)에 올랐을 때 그래서 더 좋았다. 어려운 무엇인가를 ‘정복’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방에 내로라하는 산의 꼭대기가 이어진 풍경이 보였다. 주저앉아 쉬고 먹고 싶었으나 갈 길이 멀고, 암릉을 지나오느라 시간을 많이 써버려서 서둘러 일어났다. 다시 300m 정도 가파른 내리막길로 내려갔다가 금귀봉으로 올랐다. 금귀봉으로 올라가는 길은 잘 정비되어 계단이 있고 길이 선명하다. 험한 길을 지나오면서 단련이 된 다리는 고맙게도 부드럽게 움직였다.
파란 하늘이 가까운 금귀봉 정상(837m)에는 산불 감시초소가 있었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분이 초소에서 나와 우리를 반겨 주었다. 사방이 유리로 된 성냥갑 같은 작은 오두막에서 온종일 산에서 불이 나는지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본다고 했다. 한겨울에도 초록의 생기를 잃지 않은 청송이 푸른 융단처럼 산을 덮었다. 이파리 하나하나의 윤기를 잃지 않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가. 매일 산으로 출근하는 산불 감시원은 그들의 노력을 절대 저버리지 않겠다는 결의로 찬 바람을 맞으며 초소를 지키고 있다. 산에서 믿음과 정을 쌓아가는 사람과 나무는 외로움을 서로 달래주고 있었다.
하산 길 역시 가파르고 험했지만, 이제 웬만한 경사는 두렵지 않았다. 우리는 마지막 봉인 괭이봉은 올라가지 않고 임도로 내려왔다. 100 명산을 완주한 친구는 이제 인증에 연연하지 않고 산을 다니며 어지러운 세속의 찌꺼기를 털어내고 정신을 맑게 하고 싶다고 했다. 늦깎이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기록해서 책을 내고, 주말마다 100 명산을 다니며 완등한 그녀의 의지와 열정이 보해산만큼이나 높아 보였다.
나는 경험과 지혜가 부족하지만, 책을 통해 여러 가지 빛과 만났다. 그중에는 어두운 심해를 더듬는 탐조등이 있고, 신념으로 타오른 횃불이 있다. 태곳적부터 누군가가 밥 짓는 불을 비롯해 총구 위 불꽃, 수난자의 별빛과 더불어 우리가 흔히 도깨비불, 혼불이라 부르는 푸르스름하고 불가해한 물질도 있다.*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중 ‘빛과 빛’
나보다 10살도 더 어린 김애란 작가는 가슴이 저릿저릿하고 쫄깃한 문장을 써서 독자를 탄복하게 한다. 그녀는 “책을 통해 빛을 만난다”라고 했지만, 나는 친구들과 산에 와서 “여러 가지 빛을 만난다.” 길을 잃고 헤매다 발견한 닳고 닳은 산악회 리본이 길이 여기라고 말하며 발산하는 빛, 힘들게 올라간 정상에서 맞는 세상에서 가장 먼저 내려온 하늘의 빛, 치열하게 살아온 친구의 열정의 빛, 초록의 나무를 지키기 위해 매일 험한 산을 오르는 산불 감시원의 형형한 눈빛, 아무리 산에 올라 마음을 비워도 치유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말하는 친구의 슬픔의 빛까지. 산과 산에서 만나는 사람의 빛을 받아 나는 내 인생의 빛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