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산 섬티아고 (2023년 3월)
부드러운 달빛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강력하다. 사계절을 규칙적으로 구분하는 신비함으로 근동 지방에서는 태양신보다 달의 신을 더 숭배했다. 바다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바닷물을 밀고 당기는 묘한 재주가 있는 달 덕분에 삶이 다양해졌다. 신안의 1,004개 (원래 1,025개쯤 된다고 한다)의 섬은 지구 근처를 맴도는 달이 이리저리 물을 움직이는 데 따라 헤어졌다 만났다가 한다.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 딴섬은 그 많은 섬 중 작고 볼품없어 새끼섬이라 불렸다. 밀물 때는 잠기고, 썰물 때는 드러나는 노둣길로 이어져서 한 섬이 되었다가 다시 다섯 개의 다른 섬이 되는 이 섬들을 이제는 ‘섬티아고’라 부른다.
아침 6시 50분 송공항을 출발해 대기점도로 가는 배 위에서 해가 떠오르는 바다를 보았다. 선홍빛이 수평선을 물들이더니 붉은 해가 구름을 뚫고 선명하게 드러났다. 새벽 공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도 바다 위 일출을 보려고 갑판에 나와 있었는데 해는 고맙게도 완벽하게 동그란 얼굴을 보여주었다. 나와 눈을 맞춘 해는 섬티아고로 가는 길을 환하게 비춰주었다.
크고 작은 다섯 개의 섬을 두르는 갯벌은 밑바닥이 그대로 드러나 부끄러운 듯 수줍게 반짝거렸다. 노둣길이 이은 각 섬에서 유난히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에 예수님 열두 제자의 집이 있다.(베드로 건강의 집, 안드레아 생각하는 집, 야고보 그리움의 집, 요한 생명 평화의 집, 필립보 행복의 집, 바르톨로메오 감사의 집, 토마스 인연의 집, 마테오 기쁨의 집, 작은 야고보 소원의 집, 유다 태대오 칭찬의 집, 시몬 사랑의 집, 유다 이스카리옷 지혜의 집)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후 그분의 좁은 길을 따라간 제자들의 삶은 섬티아고의 ‘순례자의 길’처럼 아름답고 편안하지 않았다. 우리는 평평한 아스팔트 길과 물이 빠진 논을 가로질러 걸으면서 사도들의 고독과 고통보다는 믿음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희망과 평화를 보았다. 멋진 아침놀을 보여준 태양이 비추어 갯벌은 구릿빛으로 반짝였고, 잔잔한 먼바다는 평화로웠다. 분홍색 겹동백은 이미 꽃잎을 다 떨어뜨렸고, 붉은 동백이 하나씩 피기 시작했다. 해가 잘 드는 곳에는 성질 급한 매화가 솜털처럼 피었다.
교회의 아버지인 베드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의 상처에 손가락을 집어넣을 정도로 의심이 많았던 토마스까지 각양각색의 성격을 가진 인간이었던 제자들처럼 개성 있는 경당을 순서대로 방문했다. 빨간 지붕을 인 마을과 상록수가 가득한 낮은 섬 산, 막 피기 시작한 동백나무가 띄엄띄엄 보이는 수수한 섬을 배경으로 한 건축물은 이국적이고 화려하다. 안에는 십자가와 장궤틀이 있어 무릎을 꿇고 앉으면 손바닥만 한 창문으로 반짝이는 갯벌이나 바다 위에 누워있는 작은 섬이 보인다. 기도가 저절로 되는 곳에서 나는 잠시 세상을 위해 기도드렸다.
12km의 여정이지만, 시간이 넉넉하여 중간에 쉴 곳이 있으면 주저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썰렁한 농담에도 웃음꽃을 피웠다. 봄을 기다리는 섬은 뭍에서 온 방문객을 맞이하면서 모든 문을 활짝 열었다. 바다를 바라보기 좋은 곳에는 지붕이 빨간 벤치가 있고, 번듯한 게스트 하우스와 카페가 손님을 맞이한다.
예수님을 배신했지만, 뉘우치고 목숨을 끊어 용서를 구한 제자로 열두 사도에 간신히 낀 가롯 유다의 집은 노둣길이 아닌 갯벌로 이어진 ‘딴섬’에 있다. 만조라 물이 금방이라도 길을 덮을 듯 밀려왔다. 아주 오래전 프랑스 몽 생미셀(Mt Saint Michel)을 다녀온 적이 있다. 꼭대기에 성당이 있고 올라가는 길에는 기념품점이며 작은 호텔이 있는 섬이다. 물이 빠지면 차를 타고 가지만, 물이 들어오면 외딴섬이 된다. 버스를 타고 뭍에 올라 조금 지나니 섬은 물에 갇히고, 석양에 비추어 장엄하게 떠올랐던 성당의 굵은 윤곽을 잊을 수가 없다. 딴섬에 있는 가롯 유다의 집은 작은 몽 생미셀 성당처럼 보였다. 붉은 벽돌 외장의 교회 모양의 건물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십자가 모양의 조각물이 걸려있다. 배신자 유다의 집에 십자가를 걸어 놓기는 불경스러웠던 것일까. 누군가 조가비와 돌을 올려놓아 나도 돌을 하나 집어다 놓았다. 나는 죄를 지었지만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 가롯 유다에게 공감한다. 사랑하는 스승을 밀고한 유다를 세상에 몹쓸 놈이라고 욕하지만, 누구나 배신은 하지 않는가. 죄책감 없이 죄인이 아닌 척 사는 사람에 비하면 가롯 유다는 제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러니한 세상을 비웃듯이 죄인 가롯 유다의 집은 아무도 살지 않는 작은 섬에서 특별히 우아하고 성스럽다.
소악도 선착장에는 두 개의 식당이 있다. 하나는 목사님이 기부제로 운영하는 밥집 ‘쉬랑께’이고, 하나는 ‘하하호호’ 국수집이다. 두 군데 모두 특산물인 곱창김을 주재료로 한다. 나는 기부 식당의 뷔페식 한식을 먹었다. 바다에서 나는 파래, 김, 김국, 해산물로 만든 반찬과 밥을 먹고 후식으로 커피를 주문해서 마셨다. 장로님 부인이 밥을 하고 아들은 커피를 내려준다. 이 섬 분교의 마지막 졸업생이라는 청년의 미소만큼 귀여운 하트가 찍힌 카푸치노와 직접 구운 쿠키는 섬티아고가 연 새로운 시대처럼 신선했다.
목사님, 장로님과 겸상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4년 전쯤부터 개신교 신자가 90%인 섬에 섬티아고 순례길을 만들었고,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편의 시설을 더 만들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화장실은 청결하게 한다고 하면서 웃었다. 섬이라 물이 부족할 텐데 논이 많다고 말했더니 저수지를 많이 만들어 논농사를 짓는다고 말해 주었다. 갯벌에 세워진 지주대에서 키우는 김은 양념하지 않아도 고소했다. 나는 섬의 맛을 간직하려고 김 한 톳을 샀다.
배를 기다리며 식당 앞 의자에 앉아 고양이와 함께 오후 햇살을 맞았다. 앞마당 같은 바다에 점점 물이 차올랐다. 비타민 D가 마구 합성하는 몸속의 소리와 12 사도의 집에서 받았던 따뜻한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하하호호’ 국수 식당에서는 술판을 벌인 친구들의 취기로 높아진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섬의 고요를 맑게 깨웠다.
동쪽 하늘에 보름을 하루 앞둔 달이 휘영청 떠올라 서울까지 나를 쫓아왔다. 태초에 달이 만든 간만의 차이로 갯벌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최초의 생물이 탄생했다 한다. 달님에게 소원을 빌었던 우리네 할머니들은 달이 가진 신비하고 강력한 힘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달은 은은한 빛을 밤하늘에 흩뿌리면서 전라도 곡창 지대를 지나, 충청도의 산 능선 위에서 당당하더니 차가운 도시의 불빛에 사그라들었다.
신석필《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