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쿠사 고고학 공원
시라쿠사의 테메니테 언덕에 있는 고대 그리스 극장(테아트로 그레코)에 앉으면 바다가 보인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대사가 울려 퍼지면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서로 눈물을 흘리는 얼굴을 바라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두려움과 슬픈 인생을 사는 착한 사람에 대한 연민을 통해 영혼을 정화하면서 그들은 조금 더 높은 경지의 깨달음에 이른다. 이런 극장에서는 희극보다는 비극이 어울린다. 혹은 비극을 공연하기 위해 이런 극장을 만든 것일까.
몰타에서 시칠리아로 가는 페리는 새벽 5시 출발이었다. 한 시간 전에 도착해야 해서 깜깜한 새벽에 나왔다. 항구를 찾아가는 길에서 몇 번이나 골목을 잘못 찾아서 헤맸다. 어린아이 눈망울 같은 별들이 배시시 웃으며 우리를 쫓아왔다. 한 번 겪었는데도 역시 괴로운 항해였다. 승무원에게 지적받지 않으려고 꼿꼿하게 앉아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포짤로항에 도착해 뜨뜻한 차 한잔을 마시면서 우리는 고향에 온 기분이 들었다. 항구 주차장에 주차했는데 문이 잠겨있었다. 같이 차를 마시던 직원들이 전화해 보라고 번호를 알려주었다. 통화하니 조금 기다리라고 해서 우리는 오래 기다릴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금방 와서 문을 열어 주었다.
지난번 시라쿠사에서 고고학 공원을 가지 못했으니 가야 했다. 우리에게 건너뛰기는 없다. 고고학 공원 입구에서 친절한 경찰 아저씨들을 만나 스트릿 파킹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들었다. 비수기라 그런지 주차 자리는 많았다. 나는 그들의 말대로 주차앱을 깔았다. 또 하나의 과제를 해결하면서 우리는 시칠리아 여행이 조금 더 만만해졌다.
고고학 공원에는 그리스 극장, 디오니소스의 귀, 로마 원형 극장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극장에서는 지금도 공연이 열린다. 객석을 따라 올라가면 인공폭포와 님프와 뮤즈를 공경하던 제단인 뮤세이온(Mouseion)이 있다. 이곳에서 배우는 예술의 여신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영감을 받고 공연을 준비했을 것이라 본다. 우리는 이오니아해를 바라보는 객석에 그리스 시민처럼 앉아 시간을 보냈다. 몇천 년의 시간이 바람 한 줄기와 함께 훅 지나갔다.
그리스 극장은 말을 내뱉는 공간이라면 그 옆 채석장의 동굴은 빛과 소리를 흡수한다. 극장을 만들기 위해 돌을 캐내고 남겨진 동굴은 커다란 귀처럼 생겨서 ‘디오니소스의 귀’라고 한다. 폭군 디오니소스가 죄수를 가두고 그들이 하는 말을 엿듣는 용도로 쓰였기 때문이란다.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에 들어가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처럼 울려 밖에서 다 들린다. 한국말을 잘하는 이탈리아 아저씨가 우리에게 친근하게 인사했다. 감옥이 있었다는 채석장 들판에는 나무에 커다란 오렌지가 주렁주렁 열렸다.
로마가 원형 극장을 활용하는 법은 그리스와는 아주 달랐다. 국토를 넓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려 했던 로마는 극장에서 게임과 오락을 질펀하게 벌였다. 사람들을 자극하기 위해 가끔 살육전까지 일어났다. 돌계단 사이로 풀이 자라나고 여기저기 무너져 황폐한 유적에는 허무하고 부질없는 욕망의 흔적만 남았다.
그리스 사람들은 산과 바다를 무대로 인간의 존재와 사유에 대해 고민했다면, 로마는 지배 계급의 권력 유지를 위해 백성을 환락에 빠지게 하는 쇼를 벌였다. 인간의 양면을 잘 보여주는 두 극장을 차례로 관람하고 우리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무엇이 옳은지 아닌지, 도움이 되었는지 유해했던지가 아니다. 역사는 그렇게 흘러갈 뿐이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카타니아다. 한 시간 거리라 금방 도착했는데 또 주차가 어렵다. 이번에도 주차앱을 이용했다. 카타니아 시내 골목 안에 있는 아파트 숙소에서 또 늦은 점심을 먹었다. 햇반과 김, 라면 몇 가지 반찬이 요긴했다. 시장이 반찬이기도 했지만.
카타니아는 시칠리아 제2의 도시이다. 다른 도시처럼 기원전부터 도시가 생겼고,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화산 폭발로 폐허가 된 도시를 에트나산의 검은 용암석을 이용해 바로크식으로 재건했다. 도시의 분위기는 무겁고 고풍스럽다. 숙소 앞 골목을 나오니 바로 가장 큰 거리인 비아 에트네아(Via Etnea)다. 우리는 오랜만에 대도시에 와서 상점 구경을 하고 작은 백화점에서 쇼핑도 했다. 겨울 세일이라고 사람들이 많아서 거리는 활기가 넘쳤다.
오늘의 제대로 된 한 끼 저녁을 먹고 나오니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뛰어오면서 우리는 사춘기 소녀들처럼 웃었다. 해가 나도, 비가 와도 여행은 재미나다. 게다가 시칠리아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