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도시

에트나산과 카타니아

에트나산(3,300m) 밑에는 아직도 화가 난 괴물 티폰이 있는 걸까. 막강한 힘을 과시하던 티폰은 제우스의 벼락을 맞고 쓰러져 에트나산에 갇혔다. 작년 12월, 이 활화산에서 오랜만에 큰 화산 폭발이 일어났다. 에트나산 정상에는 화기인지 구름인지 모르는 하얀 연기가 뿜어나오고 있었다. 머리에서 김이 날 만큼 화가 잔뜩 난 무시무시한 괴물이 이 산에는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온다고 했고, 산길이 미끄러울 것이라 해도 우리는 떠났다. 가다가 못가더라도 일정이 틀어지면 다시 기회가 오지 않기 때문이다. 카타니아 시내를 벗어나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갔다. 해발 700m까지 마을이 있어 비교적 길이 괜찮았다. 집이 거의 보이지 않고 산이 구름 사이로 아주 가까이 보이는 주차장에 사람들이 타이어에 체인을 감고 있었다. 우리는 일단 차를 세우고 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예보와 달리 해가 났고 산이 정상의 근사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나는 제주의 한라산을 생각했다. 사람들은 산의 크기에 어울리게 이야기를 지었다. 한라산은 오백 명의 아들 엄마인 설문 할망이 흙을 퍼서 만들었고, 에트나산에는 무서운 괴물이 산다고. 내가 가까이 본 산 중 한라산이 가장 높은 산이었는데 에트나산의 규모는 어마어마했고 위용은 압도적이었다. 이오니아해는 하늘을 반사해 거울같이 빛나고, 구멍이 숭숭 난 검은 바위가 흩어진 산 위 들판에는 하얗게 눈이 쌓였다. 우리는 산을 사진에 담아보려고 애썼지만, 설산의 신비한 분위기는 잡히지 않았다.

체인없이 얼음길을 더 올라가 케이블카를 타기에는 우리의 용기가 부족했다. 무리하지 않기로 하고 돌아서서 내려오는데 진눈깨비가 내리면서 정상이 모습을 감추었다. 산동네 니콜로시(Nicolosi)의 한 주유소 바에서 우리는 동네 아저씨들 옆에 서서 에스프레소 커피를 원샷으로 마셨다. 산에 더 가까이 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며.


성녀 아가다는 카타니아의 부잣집 딸이었다. 로마의 집정관 퀸티아누스는 그녀의 미모와 집안 배경이 탐이 나서 회유하고 협박했지만, 그녀는 순결을 지키고 순교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기적을 일으켜 카타니아의 수호성인이 된 그녀는 가슴을 도려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음식을 주지 않아도 천사들이 도왔으며 숯불이 지지는 뜨거운 널판 위에서도 마지막 기도를 올리다 장렬하게 순교했다.

천 년 전 로마 목욕탕인 아킬레안 온천(Terme Achilliane) 위에 세운 카타니아의 성 아가다 성당은 몇 번이나 재건해서 지금의 화려하고 장중한 건물이 되었다. 우리는 아가다 성녀의 유골이 있는 방과 카타니아 출신 오페라 작곡가 벨리니의 무덤을 찾아보았다. 벨리니는 카타니아 사람들의 자부심이다. 우리는 여행하면서 그의 오페라 《노르마》의 아리아 ‘정결한 여신’을 자주 들었다. 흑백이 우아하게 어울리는 그의 무덤은 검은 화산암과 하얀 대리석으로 정교하게 만들었다.

성당 옆 박물관 옥상에서는 카타니아 전경이 시원하게 보인다. 해가 기운을 잃고 떨어지면서 부드러운 빛을 비추어 도시는 황금색으로 빛났다. 구름에 가린 에트나산이 멀리 보이고, 바다도 보인다. 한 쌍의 연인이 주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에게 몰두해 있었다. 그들의 젊음과 사랑, 열정이 부러워 한참 쳐다보았다. 괴물이 있다는 거대한 산 밑에서 도시를 오랫동안 아름답게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의 인내와 용기도 부러웠다.

오늘은 시내 유료 주차장에 차를 잘 세우고, 에트나산에 끝까지 가지 못해 여유가 많아 식당에서 두 끼를 잘 먹었다. 긴 줄을 서서 젤라또까지 먹고 돌아오면서 복잡한 도시 카타니아에도 잘 적응했다고 생각했다. 도시는 밤늦도록 시끌시끌한데 숙소 일 층 식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각이 잡힌 하얀 테이블보가 깔린 식탁 사이에서 할 일이 없어 우리를 쳐다보는 아저씨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식당에서 먹고 싶지는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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