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미술가인 세상

《컨템포러리 아트란 무엇인가, 《테마 현대미술 노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현실을 이해되지 않게 묘사할수록 더 훌륭한 그림이 된다.”

이 시대 가장 비싼 그림을 그리는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말이다. 동시대 미술은 어렵다는 사실을, 동시대 미술가가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전시 도록을 펼쳐 들면 작품을 보기 전부터 머리가 복잡해진다. 나의 변변치 않은 안목을 탓하기보다는, 미술은 그저 보고, 잠깐 느끼고, 나의 체험과 생각을 한번 떠올려 본 뒤 마음 한편에 슬쩍 밀어 넣는 사치품이라고 여겨왔다. 그러면서도 마치 이해한 척했다. 내가 가진 미술에 대한 관점이 얼마나 미성숙한지 알게 된 것은, 동시대 미술을 다룬 책들*을 읽고 나서였다. 보기 좋은 예쁜 여자가 최고라고 믿던 남자가 어느 날 비로소 여자의 진짜 가치를 알아차리는 순간과도 비슷했다.

*《컨템포러리 아트란 무엇인가》 테리 스미스, 《테마 현대미술 노트》 진 로버트슨, 그레이트 맥다니엘

인간은 어느 한 지점에 머물지 못하고 늘 새로운 것을 향해 움직였다. 예술 역시 물질에서 출발해 수많은 단계를 거쳐 이제는 철학의 자리까지 올라와 있다. 작가는 끊임없이 기존의 경직된 사고에 저항하면서 새롭고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 내고, 우리는 그 복잡한 생각을 따라가기 위해 작가 못지않게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작품을 ‘이해’하려면 작가의 출신, 교육 배경, 가능하다면 그가 겪었을 고통과 환희까지 추적한다. 눈으로 보기 좋고, 잠깐 기분이 좋아지는 예술의 시대는 끝났다.

미국 미술사가 아서 단토는 르네상스 이후의 예술을 ‘초기 예술’(본격적인 예술 시대의 출발)로 보았다. 그 이전의 예술(pre-art)은 종교나 권력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온전히 예술이라 부르기 어렵다는 것이다. ‘초기 예술’은 ‘재현’을 최고의 미로 여긴다. 지금도 사실 그대로 정교하게 그린 그림과 조각을 ‘아름다운 예술’이라 믿는, 이른바 ‘바사리(Georgio Vasari) 내러티브’*의 관점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제 ‘예쁘게’만 그린 그림은 ‘이발소 그림’쯤으로 격하되었지만.


*대략 르네상스에서 19세기 말/초기 모더니즘 전까지로 바자리(Vasari)가 그린 르네상스 중심의 미술사처럼, 미술을 “점점 더 완벽한 재현을 향해 진보하는 이야기”로 이해하는 시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재현의 미술은 사진과 영상의 등장으로 금세 낡아 보이게 되었다. 예술가는 앞다투어 선언문과 사조를 내걸며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모더니즘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모더니즘 예술은 주장과 형식이 다양하다. 인상주의, 입체주의, 다다이즘, 추상표현주의, 미니멀리즘 등, 인상주의로 시작해 미니멀리즘과 추상표현주의에 이르러 정점을 찍은 모더니즘은 팝아트 앞에서 한풀 꺾인다. 예술은 형태도 형식도 아닌, 철학이 된다. 뒤샹이 말한 것처럼 “미술가가 선택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미술이 될 수 있는” 시대,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예술의 본질은 형식이나 재현이 아니라 ‘절대정신에 대한 자유’에 있다. 동시대 예술이 관념적이고 난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동시대 미술을 공부하면서, 서울에서 열리는 여러 전시를 찾아다녔다. 장욱진, 권옥연 같은 한국 근대 화가들, 영국의 젊은 화가 이시 우드(Issy Wood), 일러스트레이터이자 화가인 루이스 멘도의 그림 앞에서, 우리나라 근대기의 예술가와 동시대 유럽인의 정신세계 일부를 조금씩 엿보았다. 사조는 너무도 많아서 이제는 어떤 그림이 좋고 나쁘다고 단정하는 일이 거의 무의미하다. 장욱진의 단순하고 유쾌한 선과 색으로 이루어진 세계도, 무채색 옷을 입은 세련된 도시인의 분위기가 나는 권옥연의 풍경도, 모두 가난하고 힘들던 시대를 치열하게 버티며 살았던 기인들의 고민과 표현으로 가득하다. 방황하는 영국의 젊은 여성이 그린, 소소해 보이는 일상 뒤에는 삶의 의미가 흐릿해진 요즘 세상에서 자신만의 눈으로 확대해 본 냉정한 사실감이 흐른다. 도쿄에서 가족과 살아가는 스페인 작가 루이스 멘도의 하루는 보기만 해도 부러울 만큼 즐거워 보이지만, 그 역시 나름의 분투를 농담처럼 그려낸다. 이런 예술의 완성도를 도대체 어떤 등급표로 나누어 평가할 수 있을까.

이상일은 우리나라 1세대 남자 미용사였다. 삶은 달걀 한 꾸러미와 청운의 꿈만 안고 용산역에 내린 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악착같이 살았을지 나는 짐작조차 어렵다. 동네 미장원의 ‘아줌마 미용사’가 미용의 전부이던 시절에, 그는 고객의 머리카락 상태를 보고 알맞은 파마약을 골라 쓰는, 전문성을 갖춘 남자 미용사였다. 유명인들의 머리를 손질하며 그들의 까다로운 요구를 만족시키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그는 해냈다. 일하는 틈틈이 연필을 집어 들고, 일만으로는 해갈되지 않는 재능과 끼를 그림으로 풀어냈다. 매장에 찾아오는 까다로운 손님들, 꽃시장에서 짐을 나르다가 구석에서 곤하게 잠든 아저씨, 문신을 뽐내는 남자가 있는 목욕탕,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하고도 만족하지 못한 여자들의 공허한 시선, 절제하기 어려웠던 자신의 본능까지 — 그는 보고 느낀 모든 것을 가느다란 연필 선으로 세밀하게 옮겨 놓았다. 손님들의 머리카락을 작은 캡슐에 넣어 반짝이는 유리잔에 담아 디너 테이블 위에 전시하기도 했다. 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한, 자신만의 작은 잔치라 말했다.

이름난 작가들도 미술관 벽에 그림 한 점 거는 일이 쉽지 않은데, 그는 은퇴 후 자신만의 거대한 미술관을 지어 그 안을 온전히 자기 그림으로 채웠다. 그리고 그 공간을 찾는 이들에게 ‘예술이 된 삶’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한다. “느끼는 걸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해. 그래야 세상에 단 한 점뿐인 작품이 되는 거야.” 그는 같은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동시대 미술의 세계는 깊고 복잡하지만, 예술의 본질은 ‘자유로운 정신’이라는 사실은 놀라울 만큼 단순하고 명료하다. 수많은 행위와 감정, 이상과 현실 사이의 고뇌 속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삶은, 엄밀한 의미의 ‘예술 작품’은 아닐지 몰라도 이미 충분히 예술에 가깝다. 프랑스어를 그대로 가져와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상일의 문화 공간 이름 “라드라비(L’art de la vie)”는, 어쩌면 이해하기 어려운 동시대 예술을 가장 잘 설명하는 정의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미술가입니다”라고 플럭서스의 대표 작가 요셉 보이스가 말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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