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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yoonlee Jul 26. 2024

첫 산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두륜산(1산)

프랑스에서 산(la montagne)은 600m 이상이고 그 이하는 언덕(la colline)이다. 그동안 나는 그 ‘산’은 올라가 보지 못했다. 나이 탓을 하기도 하고, 무리한 산행은 무릎에 좋지 않다고 핑계를 댔다. 하지만 산 밑에서 산책하다가 등산하고 내려오는 사람의 얼굴은 지쳐 보이지 않고 오히려 빛이 났다. 사실 혼자 잘 모르는 산길을 오르기는 쉽지 않다. 낮은 언덕이라도 산길은 오묘해서 오를 때와 내려올 때 다르다. 오를 때 본 나무는 내려올 때 그 나무가 아니었고, 꽃은 그 꽃이 아니었다. 올라간 길을 그대로 내려왔는데 길을 잃어 당황했던 경험도 있다. 

산을 잘 아는 친구들이 가는 남해가 보이는 두륜산 산행에 끼었다. 그들에게 민폐가 될까 걱정되어 인왕산 중턱까지 올라가고 계단 오르기로 연습을 했다. 남쪽의 산에는 아직도 단풍나무에 붉은 잎이 남아 있고 동백나무의 기름진 초록 잎이 가득해서 이른 봄의 기운이 스며있었다. 계단과 길이 얌전하게 정상까지 이어져서 가라는 대로 쫓아서 올라가 보니 어느덧 오심재이다. 헬기 착륙장이라 한숨을 돌리는 편편한 곳이다. 그곳에서 민머리 같은 세 개의 정상 봉우리를 보았다. 신입사원이 갓 입사해서 높은 자리에 있는 상사를 쳐다보는 것처럼 까마득하게 멀리 보였다. 올라갈수록 조금씩 기온이 내려가 잎사귀를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선명하게 남은 나무는 겨울 채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바위 사이에 친절하게 만든 계단과 보조 장비로 멀리 보이던 꼭대기에 올라 보니 다도해와 구릉, 평야가 풍경화처럼 펼쳐져 있었다. 겨울치곤 푸근하고 맑아 바위에 주저앉아 아래 세상을 바라보며 무겁게 들고 온 도시락을 펼쳐 먹었다. 정상에서의 식사는 ‘먹는다’는 행위 이상이었다. 

산에는 알 수 없는 신성한 기운이 흘러 속세의 때를 닦고 순수한 본성을 찾을 수 있다. 성리학은 성인이 되기 위한 학문이다. 공부해서 성인이 되기를 꿈꾸는 학자들은 마음이 무엇인가부터 살폈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는 인의예지로 이루어진 참나, 본성이 있다. 그리고 그 둘레는 희로애락으로 표현되는 자아(ego)가 자리 잡는다. 조용한 가운데 참나를 바라보면 인.의·예·지만이 존재하며 희로애락 또한 선하게 작동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본성을 발휘하지 않고 강한 자아만으로 휘둘리면 인간은 저급한 감정을 내보인다. 

퇴계 선생은 학문을 익히고 후학을 가르치고자 선조의 부름을 79번이나 거절했다. 그리고 강이 보이는 산속 도산서원에서 본성을 찾고 이상적인 나라를 세워보고자 노력했다. 지금 우리도 순수한 본연의 모습을 찾고 싶어 산에 가는 것일까. 나는 703m 산의 정상에서 여태까지 핑계를 대며 산행을 미루었음을 후회했다. 노승봉에서 혼자 찍힌 사진 속의 나는 순수한 본성이 드러난 아이처럼 해맑아 보였다.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힘들었지만 밑에서 오래된 절 대흥사가 편안하게 품어주었다. 초의선사가 다산 정약용과 제주 유배를 하러 가는 추사 김정희의 연을 맺게 해준 절이다. 절 한쪽에 뿌리가 같이 엉켜있는 연리근이 가지를 하늘로 뻗고 서 있다. 하루살이 같은 삶을 사는 인간에게 천년의 세월을 함께 자란 두 나무는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실재였다.

절에서 주차장까지 가는 길은 단풍이 황홀한 가을이었다. 멋모르고 떠난 첫 산행에서 다 가버렸다고 생각했던 가을과 곧 닥쳐올 겨울, 그리고 봄의 희망까지 알아버렸다. 이제 산을 가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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