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 (2산, 2018년 2월)
“빨강머리 앤”은 새로 살게 될 집으로 오는 길,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보며 탄성을 지른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의 자연물에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붙이고 나면 숲이나 강, 거리는 더 이상 평범하지 않고 이름 지은 사람의 친구가 된다. 을씨년스럽기만 하던 자작나무 숲에는 무시무시한 정령이 살고 호수는 주머니 속 보석처럼 빛난다. “딱 맞는 이름을 붙이고 나면 짜릿해진다”라고 앤은 말한다. 나도 이번 산행에서 만나는 풍경마다 짜릿하게 어울리는 이름을 붙이고 싶었지만, 앤처럼 상상력이 없어서 아쉬웠다.
변산을 안내한 친구는 부안에서 태어나 자라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차돌처럼 단단했다. 부모님이 갯벌에서 조개를 캐서 자식들 학교를 보내셨다고 했다. 내가 갯벌이 많이 오염되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았다가 혼날 뻔했다. 고향이 친구에게 절대적인 근본임을 모르고 어쭙잖은 질문을 했음을 후회하고 미안했다.
산행은 수월하지 않았다. 길에는 퇴적암이 울퉁불퉁하게 깔려 발바닥이 아팠고, 봉우리의 경사가 상당히 가팔랐으며, 내려오는 길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러나 부드럽게 이어지는 산세와 벌거벗은 나무들 사이에서 반짝이며 출렁이는 진초록 바닷물을 보면 힘든지도 몰랐다. 나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사진첩을 한 장 한 장 넘기듯이 경치를 감상했다.
첫 번째 고개를 넘어 월명암이 오아시스처럼 나타났다. 잘 씻지 않았는데도 점잖고 품위 있는 하얀 털북숭이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우리를 반겼다. 등산객에게 약초 달인 물을 베푸는 산속 암자의 인심도 고마웠다. 모과가 떨어져 그대로 썩게 둔 나무 한 그루가 작은 정원에 호기롭게 서 있었다.
해발 500m,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올라가서 보는 풍경은 여느 높은 산 못지않다. 뾰족한 돌을 피해 급한 경사로를 오를 때는 바닥만 보고 걷느라 길밖에 보지 못했다. 하지만 평평한 능선에서는 여유롭게 경치를 감상하며 걸었다. 또다시 올라가니 직소폭포가 나왔다. 폭포 물이 모인 직소보를 지나 새하얀 물줄기가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그동안 눈이 많이 내려 수량이 풍부하여 물은 맑고 진한 초록으로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손을 씻어보니 시리도록 차갑고, 맑은 수면은 봄볕에 상기된 내 얼굴을 거울처럼 비췄다. 미국 버지니아에 살 때 집 근처라 가끔 산책을 갔던 그레이트 폴스 폭포가 생각났다. 수량이 많아서 언제나 하얀 거품을 내며 힘차게 떨어지는 폭포가 거대한 나라 미국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녹녹하지 않았던 미국 생활 첫 몇 해는 그레이트 폴즈(Great Falls) 폭포처럼 드라마틱하게 흘러갔는데, 변산의 폭포는 고향의 환대처럼 편안했다.
선녀탕 옆 빈터에 자리를 잡아 도시락을 먹었다. 산을 많이 다녀본 친구들은 산속 식당 터도 잘 잡는다. 물소리가 배경음악이고 편편한 돌이 의자나 테이블이 되었다. 폭포 물이 모이는 위쪽에는 물이 얕고 넓게 흘렀다. 자연스럽게 하나의 큰 폭포 물줄기가 되는 여러 개의 실개천은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들을 촉촉하게 적시면서 흘렀다. 졸졸 흐르는 소리가 봄을 알리는 것처럼 희망차게 들렸다.
다음 고개는 변산의 가장 높은 관음봉이었다. 관음봉을 지나 관음봉 삼거리로 가서 내소사까지 가야 하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 내소사로 직접 가기로 했다. 기력을 회복한 지금 후회가 되기도 하지만, 모든 일에는 회한이 남는 법 아닌가. 돌길을 내려오다 소박한 절 내소사를 들렸다. 대웅전은 단청이 없이 단아해 소박한 옷을 입은 귀부인 같았고 하얗게 바랜 연꽃 문살무늬는 현대적이고 세련되었다. 천정을 받치는 기둥과 처마 모두 못하나 없이 끼우고 맞추어 만들었다. 절 앞 마당에서 천년을 살아온 나무 앞에 서니 부처님, 예수님 말씀이 그대로 들리는 듯하다. “공즉시색 색즉지공(空卽是色 色卽是空)” “주께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마라”(베드로 후서 38)
산행 계획을 꼼꼼하게 세우고 시간을 잘 지켜서 다녔더니 우리는 해가 떨어지기 전 저녁 식사를 하고 낙조를 보러 바다로 갈 수 있었다. 로봇이 인간의 일을 대체하는 시대에도 바다로 나가는 어부들은 예전의 방식으로 제사를 지낸다. 계망 할미를 모시는 수성당에는 깃발마다 배 이름이 적혀있고, 짚으로 만든 배는 해안에 대기하다가 불에 태워서 바다에 띄워 보낸다. 소동파의 적벽강을 따서 지었다는 붉은 암석의 적벽강이 수성당 올라가는 길목에 있다. 우리는 맑은 물이 얌전하게 들어왔다 나가는 몽돌 해변에서 소동파처럼 부안 특산 뽕막걸리를 마셨다. 그리고 구름이 두꺼워 사라진 화려한 일몰 대신에 망망한 서해에 퍼지는 희미한 겨울 해의 잔상을 즐겼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 되면 함께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가족처럼 친숙하게 보인다고 했던가. 자기 고향을 온 마음을 다해 전하고자 애쓴 친구, 호기심 많은 나의 질문에 어디서나 조곤조곤 설명해주는 친구, 걸음이 늦어 뒤처진 친구를 조용히 기다려주는 친구, 풍경이 좋은 곳에서 가장 좋은 모습을 포착해 사진을 남겨준 친구들. 나는 그들에게 빨강머리 앤처럼 딱 맞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새벽부터 빛이 두 개인 시간까지 보내면서 친해진 친구들에게.
*폭포-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