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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yoonlee Aug 09. 2024

지리산은 옳다

3산 노고단에서 1박(2018년 5월)

“지리산은 옳다. 또 지리산은 보약 한 재보다 낫다.” 나의 첫 지리산행을 축하하며 한 산꾼 친구는 말하였다. 그동안 두어 번 원정 산행을 했고 북한산 둘레길을 걸었지만, 지리산 같은 1,000m 넘는 높은 산은 가보지 못했다. 그런데 홀로 며칠씩 산행을 하는 한 친구가 지리산행을 제안했다. 나는 친구를 믿고 단번에 가겠다고 했다. 산 위에서 자고 이틀 동안 지리산을 쏘다닌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찼다.

우리는 남부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구례에서 내렸다. 산 아랫마을의 정경이 푸근했다. 성삼재까지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우리는 작은 시골 터미널 앞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긴 산행을 앞두고는 음식이 보이면 먹어두어야 한다고 친구가 말했다. 산에서 허기가 지면 걷기 힘들고, 체력이 떨어지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삼재로 가는 길은 멀미가 나도록 꼬불꼬불했다. 내릴 때 안전하게 운전해준 기사님에게 감사의 인사가 저절로 나왔다.

 노고산 대피소까지 올라가는 길이 험하지는 않지만, 이틀 산행의 첫출발이라 배낭이 무거워 힘이 들었다. 그래서 가끔 평상에 누워 뚫어질 것 같이 파란 하늘을 보고, 꽃 이름도 살펴보면서 천천히 걸었다. 편편하고 완만한 길가에는 통통하게 살이 찐 하얀 꽃봉오리를 맺은 나무들이 햇살에 반짝였다. 은빛 가지에 잔뜩 봉오리를 매달고 있는 나무는 나중에 보니 함박꽃나무였다.

노고단 대피소는 대피소 중 호텔급이다. 수세식 화장실과 세면대(그러나 세수와 양치는 할 수 없다), 향기 좋은 나무로 된 3층 침대가 있다. 등산객들은 모두 조용히 깨끗하게 자고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나야 한다. 대피소에 짐을 맡기고 노고단에 오르니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모든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노고단에서 만나는 것 같았다. 사방이 능선으로 둘러싸여 있고, 밑에는 곡선을 그리며 흐르는 섬진강을 끼고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시간은 망각의 강 레테강의 물이라고 한다. 여행 중의 공기도 비슷한 음료수라서 시간만큼 깊은 효과를 내지는 못하지만, 망각의 효력이 빠르다.”라고 토마스만은 ≪마의 산≫에서 말했다. 나는 레테강의 물과 같은 지리산의 순수한 공기를 마시며 모든 상념을 잊어 편안했다.

노고단을 내려와 반야봉까지 가는 길은 험하지 않았고 금방 떨어진 진달래가 땅에 다시 한번 꽃을 피워 꽃길을 만들었다. 지고 나서도 아직 진분홍색인 꽃은 주어다가 화전을 해 먹어도 될 만큼 생생했다. 피아골 삼거리를 들러 돌아오는 길에는 오후의 주황색 햇볕을 받은 수목이 찬란하게 빛났다. 아직은 쌀쌀한 봄바람을 맞으며 밖에서 저녁을 먹고 우리는 어린왕자처럼 일몰을 기다렸다. 1,000m 이상의 산에서 일몰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태양은 마주하기 힘들 정도로 노랗게 빛나더니 점점 사그라들어 빨간 동그라미를 만들며 스러졌다. 나무 사이에 걸린 빨간 알사탕 같은 해는 오랫동안 산 위의 하늘을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나지 않는 사람은 매우 강하거나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라고 시인은 말했다. 지리산 노고단에서 지는 해가 한바탕 펼치는 색의 잔치를 보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저절로 떠올랐던 것을 보면 나는 그리 강하지도 진짜 외롭지도 않은가 보다.      


다음날 우리는 반야봉에 가린 반쪽 일출을 보고 성삼재로 내려왔다. 성삼재의 커피집에서는 커피와 간단한 요기 거리를 팔았다. 이제부터는 온종일 걸어 정령치에서 점심을 먹고 바래봉까지 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어제 걸었던 코스만큼 평탄하지 않고 날이 갑자기 더워져서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새벽에는 거의 겨울 같은 찬 바람이 불었는데 낮이면 초여름 햇볕이 따가웠다. 이산 저산이 이어지는 능선을 걷고, 깊은 산속의 좁은 길을 오르내리며 태곳적의 순수한 기운을 가슴에 가득 채웠다. 가끔 마주 오는 등산객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어디서 왔느냐, 얼마나 걸리느냐 물으면 친절히 잘 설명해주었다.

빨치산의 슬픔과 고통을 재현하는 것처럼 이맘때면 철쭉은 지리산을 피처럼 붉게 물들이지만,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는지 앙다문 꽃봉오리만 다닥다닥 달려있었다. 하지만 철쭉에 지지 않을 만큼 고고하게 피어 있는 키 작은 야생화가 산행이 힘들 때마다 우리를 위로해 주었다. 상상할 수 없이 오래 살아 온 나무들은 청년처럼 싱싱한 연두 잎을 달고 미풍에 흔들리며 반기고, 무덤덤한 바위와 돌은 나그네에게 쉴 곳을 주었다.

산행은 지도에서 한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개인의 체력과 리듬, 혹은 날씨에 따라서 더 걸리거나 덜 걸릴 수도 있다. 친구는 처음 계획한 바래봉까지는 무리라고 결정했다. 그리고 고리봉을 지나 세걸산을 갔다가 세동치에서 전북학생교육원 가는 갈림길에 도착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하산이냐 더 오르느냐를 두고 망설였다. 그녀는 익숙하게 국립공원 사무소에 전화하면서 그들의 의견을 따르자고 했다. 그들은 해가 지기 전에 내려오라고 권했다. 그래서 우리는 전북학생교육원으로 내려왔다.

산에는 선한 기운이 서려 있어 무리해서 산을 정복하려는 어리석은 인간을 다독여 무사히 하산하도록 도와준다. 아주 오래전부터 살아왔던 나무들, 해마다 부활하는 풀과 야생화, 그들이 가진 신성한 생명력으로 가득한 산은 낙관과 희망의 힘을 전해준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산의 보호를 받고, 전문가의 조언을 잘 따라서 어둑해지기 전 산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남원에 도착해 막차를 타기 전 시간 여유가 있어 추어탕을 먹었다. 남원의 추어탕을 든든하게 먹고 나니 방금 내려온 산에 다시 가고 싶었다. 지리산은 정말 옳다. 그리고 분명 보약 한 재보다 낫다.     

 

*농담 – 이문재

     

후일담 : 돌아와서 지도를 보니 하루 반을 꼬박 걸었는데도 지리산 전체 길의 반도 걷지 못하였음을 알았다. 나는 두 발로 걸어 보고야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내가 얼마나 초라한 자연의 한 부분인지를 실체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지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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