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여성봉과 오봉(2018년 7월)
생전에 일요일마다 북한산에 다녔던 소설가 이병주는 ‘산을 오른다는 것’을 이렇게 찬양했다. "산을 오른다는 것은 한 걸음 한 걸음 나를 높여가는 노릇이다. 산을 오른다는 것은 한 걸음 한 걸음 마다에 나를 확인하는 노릇이다. 하늘 아래에 산이 있고. 그사이에 내가 서 있다는 이 단순한 사실이 어쩌면 이처럼 고마울 수가 있을까.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순간 천지간에 나의 위상은 확고부동한 것이다."*
산 아래에서 북한산 꼭대기 하얀 암반을 올려다보면 과연 저기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하지만, 국립공원의 산길은 친절하게 뻗어 있고 암벽 타기 같은 특별한 기술 없이도 정상 등반의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인공물이 가득한 도심에서 시내버스로 불과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고도 800m가 넘는 북한산은 서울 사람에게 축복이고 보물이다.
이병주씨 만큼이나 북한산을 많이 다닌 친구의 안내로 쳐다보기도 어려웠던 북한산의 봉들을 올라가 보았다. 삼천사에서 시작하여 비봉과 사모바위를 비를 맞으며 다녀왔고, 북한산성부터 나월봉, 나한봉, 문수봉, 또 다른 날에는 북한산성에서 원효봉까지 갔다가 일행은 가장 높은 정상 백운대를 가고 나는 시간이 없어 아쉽게 돌아왔다.
이번에는 송추계곡을 올라 여성봉과 오봉, 그리고 도봉산 신선대를 오르다가 너무 더워서 하산하였다. 들머리의 나지막하고 정다운 숲길을 조금 걸으면 가파른 돌계단 또는 흙길이 나타나 숨이 차다. 정상에 오르기 바로 전에는 겹겹이 포개진 우람한 바위 사이에 있는 좁은 길로 들어간다. 바위에 쇠심을 심어 튼튼한 손잡이를 만들어 놓거나 달님이 착한 오누이에게 내려주었던 동아줄 같은 밧줄이 있어서 안심하고 오를 수 있지만, 거대한 바위산을 처음 마주하고는 아연실색하였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한 발씩 조심스럽게 내딛다 보면 노고를 보상이라도 하듯 발아래 시원한 장관이 펼쳐진다. 산밑에서 올려보았던 무서운 장군 얼굴 같은 봉우리들도 정상에서는 옆집 아저씨처럼 친근하게 보인다. 봉우리는 편평한 암반이라 그곳에서 정상에 오른 기쁨을 나누고, 사진 찍거나 가만히 풍경을 감상하기 좋다. 시간 여유가 있거나 혼자 온다면 책을 읽고, 낮잠을 한숨 자고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날이 유난히 맑은 날은 멀리 인천과 강화도 마이산까지 깨알처럼 보여 세상이 보잘것없다고 으쓱해 볼 수도 있다. 진초록의 나무가 열대 우림처럼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숲의 바다를 내려다보면 아찔해서 셀 수 없이 많은 나무 가운데 있는 나의 존재는 완전히 자연의 한 부분이 된다. 산에 오르는 “이 순간 천지간에 나의 위상은 확고부동한 것이다”!
거대하고 기이한 바위 중에 여성봉은 이름처럼 여성의 성기를 닮아서 보기조차 민망하다. 일부러 심었는지, 저절로 자랐는지 키 작은 소나무 한 그루가 묘한 자리에 자라났다. 사람들이 만질까 봐 오르지 못하게 막아놓고 돌아가는 길을 만들었다. 여성봉 뒤에 또 다른 바위가 있고 거기서는 오봉이 보인다. 다섯 개의 남성적인 봉우리가 여성봉과 음양의 합을 이루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해서 자연을 의인화해서 이름을 붙이고 그럴듯한 전설을 만든다. 이야기는 슬플수록 비극적일수록 인상에 남아 여성봉과 오봉에도 남과 여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북한산성으로 내려오는 길이나 도봉산에서 송추계곡으로 내려오는 길은 계곡물이 있어 하산길이 더욱 즐겁다. 비가 많이 와서 수량이 풍부해 물소리만 들어도 시원하다. 물은 부끄럽도록 맑고, 시리도록 차서 등산화를 벗고 발을 잠시 담그기만 해도 온몸에 한기가 서려 땀이 식는다. 친구들과 맨발을 담그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면서 힘든 산행을 마친 기쁨을 나누었다.
경사진 오르막을 힘겹게 오른 다음 한숨 고르며 푸른 물결의 능선을 유유자적하며 걷고, 고소공포증으로 거의 울뻔한 친구를 달래며 출렁다리를 조심스럽게 건너며 같이 사진을 찍고, 풍광 좋은 장소를 골라 도시락을 오손도손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우리는 인생과 책과 사람에 관해 산을 닮은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등산은 "나를 높여가고 나를 확인하는 노릇”이라고 작고한 소설가는 말했지만, 우리에게 산행은 거대한 자연과 친구와 나의 관계를 확인하는 노릇이기도 하다. 긴 세월 동안 그러했듯이 오늘도 산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어 더욱 깊고 아름다워진다.
*산을 생각한다 - 이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