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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yoonlee Aug 23. 2024

'좋은 사람'

5산 지리산 세석,촛대봉, 연하봉, 장터목 (2018년 8월)

또다시 지리산행. 몇 달 전에는 해발 1,000m 이상까지 차를 타고 올라가서 산행을 시작했기 때문에 진정한 지리산행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백무동에서 6.5km를 걸어 세석평전에 가서 대피소 산장에서 숙박하고, 촛대봉을 지나 연하봉, 그리고 장터목 대피소에서 짐을 맡기고 천왕봉을 올라갔다 내려오기로 했다. 같이 가는 친구들이 지리산을 수십 번 다녀온 경험이 있어서 든든했다.

세석평전으로 오르는 산길은 돌이 많고 가파르지만, 길옆으로 흐르는 한신 계곡의 물소리가 경쾌해서 발걸음이 가벼웠다. 섭씨 35도가 넘는 더위를 무성한 나무 그늘에서도 피할 수 없었다. 우리는 ‘첫나들이폭포’를 보고 계곡물에 들어가 땀을 씻었다. 기능성 등산복은 입은 채로 물에 들어가서 흠뻑 젖어도 조금 걷다 보면 금방 마른다. 물살에 닳고 닳아 맨질맨질하고, 나무 사이로 비추는 햇살로 따스한 바위에 앉으니 바지 사이로 물이 흘러 간질간질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물을 튀기며 장난하면서 더위를 잊었다.

젖은 옷이 거의 다 마를 때쯤 보라색 산수국이 만발한 사이에 주황색 하늘말나리꽃이 고고하게 고개를 들고 피어 있는 암벽 아래에 멈춰 숨을 골랐다. 바위틈, 나무 사이 조그만 틈만 있어도 싱싱한 풀이 자라고 꽃이 피어 생명의 에너지가 충만했다. 습도와 온도가 높아서 그들이 발산하는 색과 향기가 짙었다. 나는 숨을 크게 쉬어 귀한 향기를 들이마셨다.

세석평전까지 가려면 70도 경사인 깔딱 고개를 넘어가야 한다. 숨이 가쁘게 걸으며 마주치는 사람들은 서로 용기를 주고 먹을 것도 나누어 먹는다. 전주고 3학년이라는 소년들이 바람처럼 지나가며 인사를 했다. 나는 선생님과 아이들이 기특해서 칭찬해 주고 힘내라고 사탕을 주었다.

정말 깔딱하고 숨이 넘어가기 직전 신기루처럼 세석 대피 산장이 보였다. ‘잔돌고원’이라 불렸던 세석평전은 깊은 산골의 오아시스 같았다. 이곳에서 예전에 화전민들이 농사를 지었다고 했다. 산장에 도착해 짐을 풀고 보니 보석같은 초저녁 하늘이 땅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사파이어처럼 짙은 푸른색 하늘에 황금빛 반달이 뜨고 하나둘씩 뜨는 별은 쓰부 다이아몬드처럼 황홀하게 반짝였다. 고기를 구워 먹자고 돌로 된 불판을 지고 오느라 뒤쳐진 친구들은 깜깜해져서야 도착했다.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산골의 어둠이 짙어지도록 오지 않는 그들을 목을 빼고 기다리던 우리는 손뼉을 치며 반가워했다. 그리고 서둘러 보따리를 풀어 무겁게 지고 온 돌 불판에 고기를 굽고 김치찌개를 끓여 늦은 저녁을 먹었다. 산 정상의 밤은 신비한 기운이 있어서 마음의 문은 스르르 열렸다. 초롱초롱한 눈망울 같은 달과 별이 내려다보는 데서는 진심이 아닌 것들은 말할 수 없다. 소중한 시간은 잘도 흘렀다. 왁자지껄하게 먹고 떠들던 사람들도 다음 날을 위해서 잠을 청하는지 사위는 고요해졌다.

다음날 일행 몇 명은 일찍 떠나 촛대봉의 일출을 보고 천왕봉을 오르고 내려오기로 하고, 나는 늦잠을 잔 몇 명의 친구들과 조금 더 쉬다가 장터목으로 가서 합류하기로 했다. 산장에 남은 우리는 세석 대피소 앞마당에서 보이는 일출의 그림자를 보면서 친구가 내려준 커피를 맛보았다. 대부분 새벽 산행을 떠나 한산한 산장의 테이블에 앉아 마시는 커피는 지리산의 최고봉 등반을 놓친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천왕봉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지리산 자락을 지키고 있을 테니까…….

장터목으로 가는 길에는 촛대봉, 연하봉, 삼신봉이 있다. 돌길이지만 오르내림이 많지 않아서 수월하고 골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살아있어 기품있고, 언제 죽었는지 모르지만, 기개가 하늘을 찌를 듯한 구상나무가 군락을 이루었다. 지리산의 능선은 구름 사이로 아스라이 펼쳐있고, 구름은 산 사이를 유령처럼 드나들었다. 우리는 신선처럼 구름 속을 걸으면서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나는 이렇게 능선을 걸을 때가 산행 중 가장 좋다. 올라갈 때는 힘이 들고, 하산은 가끔 지루하기도 한데 1,500m 이상의 꼭대기에서 봉을 따라 오르내릴 때 나는 한옥 지붕의 용마루를 건너뛰는 무협영화의 무사가 된다.

천왕봉을 오르고 우리와 비슷한 시간에 장터목에 내려온 친구들과 만났다. 우리는 모두 다 함께 컵라면 등으로 점심을 해 먹고 하산을 시작하였다. 가파르기도 완만하기도 한 경사를 내려오기는 올라갈 때처럼 도전적이지는 않아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기 좋았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말해 보자고 했다.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좋은 사람'이란 사려가 깊은, 생각이 진중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나는 친구에게 맛있는 고기를 먹이겠다고 무거운 불판을 지고 오고, 그 친구가 늦어지자 그를 마중하러 깜깜한 산길을 되돌아가는 ‘좋은 사람’과 함께 산행했음을 알았다. 무엇보다도 더울 때 물과 바람을 주고, 가쁜 숨을 쉴 때 에너지 가득한 공기를 준 지리산은 우리에게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산 밑 계곡에는 좋은 산 지리산에서 여름의 끝을 잡고 노는 사람들의 환호성이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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