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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yoonlee Sep 06. 2024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서"

7산 명지산(2018년 8월)

강원도의 장엄한 산세가 이어진 경기도 가평에는 울창하고 높은 산이 많다. 명지산은 연인산의 바로 옆 산으로 경기도에서 화악산 다음으로 높다. (1,267m) 흙산인 연인산과 달리 이 산은 오르는 길이 가파르고 돌이 많은 악산(岳山)이다. 우리는 명지 1봉, 2봉, 3봉을 차례차례 오르고 급경사로 내려오는 산행을 했다. 거의 20km 이상이었다. 평평한 능선이 짧고 너덜길 (돌이 많은 비탈길)이 많아서 바닥이 두꺼운 등산화를 신었어도 발바닥이 아팠다.

오르는 길에 있는 영지 폭포는 가파른 계단을 한참 내려가야 근사한 풍경을 보여줘서 초보 산꾼을 갈등하게 한다. 하지만 산에서는 한번 지나가면 다시 오기 어렵다는 사실도 깨달은 초보다. 폭포수는 이끼가 낀 커다란 바위 사이에서 하얗게 소리치며 떨어져 웅덩이에 초록빛으로 얌전하게 담겼다. 지난주 만해도 물만 보면 뛰어 들어가고 싶었는데 처서가 지나고 보니 언제 저 차가운 물 속에 들어갔었나 싶다. 쏟아져 내려오는 물을 바라만 보아도 한기를 느꼈다. 그래도 폭포를 만나면 가쁜 숨을 고르며 잠시 쉬어갈 수 있어 좋다. 그리고 떠날 때는 아쉬운 마음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명지 1봉, 2봉, 3봉까지 오르고 내렸다. 뽀얗게 너른 바위가 펼쳐진 명지 3봉에서는 지난주 올랐던 연인산의 봉우리가 보였다. 구름이 많아 시계(視界)가 희미했지만, 북한강 조각이 저무는 해를 은은하게 반사해 거울처럼 빛났다. 정상에서의 망중한은 언제나 그렇듯이 신선의 시간이다. 우리는 산신령처럼 잠깐이지만, 영원한 순간을 즐겼다. 힘이 많이 든 산행이어서 기대한 만큼 정상에서의 시간은 충만했다.

명지산도 연인산처럼 인적이 드물고 여름 끝이라 수풀이 마구잡이로 자랐다. 우리는 거의 사라진 길을 헤치며 하산을 시작했다. 비가 많이 오면 물이 흘러내려 계곡이 되기도 하는 너덜길이 나타나 애먹었고, 키가 큰 풀이 앞을 가려 일행이 보이지 않아 당황했다. 한참을 걷고 또 걷다가 보니 과수원을 품은 집이 보였다. 온종일 산을 헤집고 다니다가 인가를 만나니 눈이 번쩍 뜨이도록 기운이 났다. 

벌써 하늘에는 노을이 퍼져 구름이 과수원의 사과처럼 발그레해졌다. 사과나무에는 거의 다 익어 수확을 앞둔 사과가 탐스럽게 달려있었다. 우리는 시장하기도 하고 사과가 에덴동산의 열매처럼 먹음직스럽게 보여 주인에게 팔라고 했더니 팔지는 않고 몇 개를 그냥 주었다. 과수원 주인은 자식들에게 먹이려고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유난스럽게 더웠던 여름의 햇살과 산바람, 거기에 부모의 정성까지 먹고 자란 사과는 달콤한 즙이 가득했다. 나는 씨만 남기고 거의 다 베어 먹었다. 

저녁을 먹을 때라 식당이라도 있을까 하고 백둔리 마을에 내려와 찾았으나 식당은 없고, 허름한 구멍가게도 닫혔다. 그래서 가게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데 어둠이 성큼성큼 내리더니 보름달이 산 위로 떠 올랐다. 처음에는 작게 나타나 조금씩 커진 보름달은 검푸른 하늘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화성이 바로 옆에서 달을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듯이 반짝거렸다. 검은 구름이 지나가면 그 사이로 달은 교교한 빛을 비추어 주위를 은빛으로 물들였다. 긴 산행에 지치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 우리는 보름달의 신비한 기운으로 힘과 용기를 얻었다. 

백석은 “십 오촉 전등이 내어던지는 지치운 불빛 아래에서 흰바람 벽에 이러한 글자가 지나갔다”라고 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나는 산행을 마치고 달빛만 남아있는 산 아래에서 이 위대한 시에 감히 덧붙이고 싶었다. “꼭꼭 숨어있는 폭포, 하얀 바위가 툇마루처럼 펼쳐진 최고봉, 유리알처럼 빛나는 강물, 본성대로 자라난 나무와 풀이 빽빽한 숲, 그 숲이 도시락을 나누어 먹으라고 마련한 빈터, 인심 좋은 과수원의 노을빛 사과, 그리고 주린 배도 채워주는 보름달이 그러하지 않은가.”라고. 우리는 오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서” 살았다. 

순수한 달빛을 좀 더 받고 싶은데 멀리서 버스가 털털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흰바람 벽이 있어-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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